이 글을 통해 나치 독일의 선전부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생애와 그의 선동 전략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괴벨스의 어린 시절, 장애와 고통, 학문적 성취를 통해 형성된 그의 세계관은 나치당과 히틀러에 대한 열렬한 지지로 이어졌다.
특히, 1943년 “총력전 연설”에서 그의 연설 기술과 선동 전략이 절정에 달했다.
괴벨스는 언어적, 연출적, 수사적 기법을 통해 대중의 감정을 조작하고 나치의 이념을 강화하였다.
그의 생애와 그가 나치의 선전에 사용한 선동 기술을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1. 서론
“우리는 일찍이 한결같이 승리를 믿어 왔기에 이 순간 국민적 의식을 고취하고 내적 성숙을 더욱 견고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가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앞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승리만이 최고라고 하는 결단력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이 순간의 계명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까닭에 이 시각부터는 다음과 같은 구호가 있을 따름입니다.
자, 민족이여 일어나라, 감연敢然히 일어나 폭풍을 일으켜라!”
(Nun, Volk, steh auf und Sturm brich los!)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한 파시즘은 이탈리아와 독일을 거쳐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 독일의 파시즘은 나치라는 이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촉발하였으며, 홀로코스트로 일컬어지는 학살을 자행하였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나치 독일 프로파간다의 대리자로서 그의 수사적 기술은 20세기 초의 정치적 상황을 조작하고 대중의 의견을 다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중 매체를 통한 선동 전략과 수사 기술로써 괴벨스는 높은 영향력을 지닌 나치 독일의 주요 인물로서 주목받았으며 현재까지도 나치 독일에 부역한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으로 인식되고 있다.
위의 인용문은 1943년 2월 18일 베를린 체육궁전에서 행해진 괴벨스의 연설 마지막 구절이다. 당시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대패한 상황이었고, 괴벨스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국민을 단결시키고 전면전을 치르고자 하였다. 장장 2시간에 가까운 연설 속에서 그는 독일군이 패배하였다는 말을 “우리는 동쪽에서 목하 무거운 군사적 부담을 겪고 있다.”로 대신하여 독일 국민의 사기를 보전함과 동시에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여 전면전의 여론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당시 연설을 듣는 청중의 수는 만 사천여 명에 이르렀고, 연설은 대중들의 “브라보”나 “하일”과 같은 환호에 수십 번 중단되기도 하였다. 괴벨스는 1943년 연설을 비롯한 수많은 연설에서 대중을 전면전의 여론 속으로 결집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뛰어난 수사적 기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요제프 괴벨스의 일생과 그가 나치에 부역하게 된 정치적 배경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어 괴벨스가 독일 국민을 선동하는 데 사용한 선동 전략과 (연출적, 어휘적, 수사적) 기술을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그의 미디어 전략이 어떻게 정치적 이념을 확산하고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였는지를 체계적으로 따져 보고자 한다.
2. 괴벨스의 생애와 정치적 배경
1897년 괴벨스가 탄생하던 때, 독일제국은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승리 이후 수립된 독일제국은 눈부신 속도로 강대국으로 떠올랐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다른 강대국들과 정치적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갓난아기 때에 폐렴을 앓은 탓에 허약한 유아 시절을 보냈다. 4살 때는 골수염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만고의 노력 끝에 수술을 진행했으나 실패하면서 그는 평생을 만곡족彎曲足으로 살아가야 했다. 기형적인 신체장애로 인해 유년 시절 따돌림을 당했고 이에 그는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여 집 밖으로 나가기를 꺼려했다. 동시에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증오하였으며, 그럼에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어머니를 비웃게 되었다. 고집스럽고 학업을 등한시하던 괴벨스는 문제아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리 수술로 병원에 입원하던 도중 동화책을 읽으며 지적 호기심을 일깨웠고, 이후 부지런히 공부하여 반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거듭났다. 그는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갖춘 학생이었다. 라틴어, 지리, 수학은 물론이고 미술이나 음악 등에는 특히 월등한 성적을 거두며 학업의 소질을 내보였다.
괴벨스에게 신은 장애라는 족쇄를 채운 존재였으나, 동시에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모든 희망을 신에게 걸었고 신학을 공부하여 성직자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괴벨스는 장애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학생들은 괴벨스가 쓴 시를 그의 장애를 조롱하며 읊었고, 처음으로 여성에게 다가가고자 했던 시도는 그녀의 가족이 그를 살해하려는 지경까지 이르며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버렸다. 그의 소년기는 쓰라린 현실과 괴벨스의 망상 속 허구의 괴리에서 고통 받던 시간이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면서 전쟁의 분위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독일에서 전쟁은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독일인들은 독일 군대가 곧 프랑스에서 행진할 것이라며 기대에 들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괴벨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 전쟁이란 현실을 뒤바꾸어 주는 희망과도 같았다. 언제나 “집단”에 속하고자 했던 그는 군인에게 환호를 보내는 군중 속에 자리 잡아 연대감을 느꼈다. “주님을 찬양”하면서 신을 섬기는 대신 “독일, 모든 것 위의 독일”을 외치던 괴벨스의 세계관 속에서 애국심은 종교와 위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한 것이 되었다.
1917년 괴벨스는 우수한 성적으로 아비투어에 합격하였다.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 덕에 대표로 졸업사를 낭독하였는데, 역사적 달변가로 오늘날까지도 이름을 떨친 그가 처음으로 그의 세계관을 군중 앞에서 내보인 순간이었다.
독일 민족은 이제 스스로가 현재의 모습보다 더욱 위대하며 세계의 정치적, 정신적 지도자가 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 독일, 막강한 조국, 우리 아버지들의 신성한 나라, 굳게 서 있으라! 곤경과 죽음 안에서도 굳게. 그대들은 영웅적 힘을 보여주었고 최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 신이여, 조국을 돌보소서.
그러나 그의 세계관은 독일의 패전으로 위태해졌다. 패전 직전까지도 독일의 승리가 예견되었고, 독일 영토에서 전투 한 번 벌어지지 않았던 터라 독일 국민들은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괴벨스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패전으로 인한 그의 분노는 “대중”을 향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급하고 무의미한 군중의 혼동 속에서 사람들이 다시 지도자와 힘을 찾아 절규할 때가 되었다.”며 우매한 대중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를 갈망하는 그의 심리를 내비쳤다. 불안한 사회 정국 속에서 괴벨스는 장애로 인한 쓴 현실에서도 학업을 계속하여 이어나갔다. 일생의 연인이었던 안카 슈탈헤름Anka Stahlherm과 결별하며 깊은 상심에 빠져 방황했으나, 가족의 돌봄으로 극복하고 학업에 열중하여 자신의 장애에 대한 보상으로서 갈망하던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패전 이후 투쟁동맹Kampfbund으로부터 국수주의를 표방하는 반유대주의적 조직들이 등장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민족과 사회주의의 화해를 목표로 고트프리트 페더Gottfried Feder가 세운 독일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이었다. 괴벨스 박사는 신문에 여섯 편의 글을 연재하였는데, 그 중 우리 시대의 의미에 대하여에서 그는 “외부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순진한 독일인들”을 비판하며 바이마르 체제는 독일이 감수해야 하는 수치스러운 영토 분할과 배상 요구에 직면하였으며, 독일의 영혼은 죽지 않았고, 단지 병들었을 뿐이라며 독자들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그는 참된 독일성에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SDAP을 ‘새로운 태양’에 비유하며 이에 관심을 보인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베를린으로부터 구원이 나타날 순 없다. (…) 때때로 남쪽에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태양’은 뮌헨이라는 ‘남쪽’ 지방에서 점점 큰 발언권을 얻고 있던 나치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에게 나치당은 새로이 떠오르는 ‘독일의 영혼’으로 인식되었고 그들의 부상을 관심을 두고 지켜보았다. 독일 점령지에서 저항 세력이 완전히 붕괴되며 괴벨스의 희망도 꺾이는 듯했으나, 1923년 뮌헨 폭동 뉴스를 접한 그는 독일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일생은 항상 불행 속에 있었다. 부모와 약혼녀에 의존해서 사는 상황을 못마땅해 했으며 모두가 자신을 따돌리는 것만 같은 느낌으로 타인을 증오했다. 무엇보다 그는 돈을 증오하는 심리를 보였는데, 은행에서 일하던 와중 루돌프 모세Rudolf Mosse와 레오폴드 올슈타인Leopold Ullstein에게 취직을 거부당하며 돈과 함께 유대인들에게도 깊은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더불어 스튜어트 체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의 [19세기의 기초Die Grundlagen des neunzehnten Jahrhunderts]는 26살의 괴벨스에게 인종주의적 세계관을 심어 주었다. 체임벌린은 저서에서 아리안 종족만이 ‘문화의 정수’이며 순수한 인종은 아리안 종족과 유대 종족 둘 밖에 없다는 주장을 내비쳤다. 고대 그리스의 유산을 계승한 아리아 종족은 ‘지배 인종’이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종족으로 선택 받았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물질주의적 도그마’에 영혼을 잃지 않고 종족의 ‘순화’가 이루어야 한다고 저술했다. 후에 괴벨스는 체임벌린을 만나고 그를 ‘선구자’, ‘우리 정신의 아버지’로 추앙한 바 있다. 이제 괴벨스에게 유대인은 ‘물질주의의 화신’이자 이 세상의 악덕에 책임이 있는 존재였다.
괴벨스는 독일에게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빈자리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로 채웠다. 괴벨스는 히틀러와 그가 이끄는 나치당에 속하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이자 나치당의 조력자의 아들이었던 프리츠 프랑Fritz Frank과 어울리며 나치당에 발을 들이고자 했다. 1924년 8월, 괴벨스는 바이마르에서 열린 민족주의 단체 모임에 참석하여 나치당의 선동가 율리우스 슈트라이허Julius Streivher를 만났고 그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괴벨스는 슈트라이허 외에도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을 만났다. 그는 그 속에서 더 이상 장애를 가진 외톨이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통합된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이후 괴벨스는 민족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봉사를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는 라인란트에서 민족주의 집회를 개최하였는데, 같은 해 9월, 한 집회에서 연설가로 데뷔하였다. 사전 원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중을 장악하였으며, 자신을 욕하는 관중들에게도 직접 대응하며 모든 분위기를 좌지우지하였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연설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을 깨달았다. 1925년 2월 괴벨스는 나치당에 입당하였으며, 이후 연단에 자주 올라 자신의 재주를 이용하였다. 1년간 무려 189번의 선동 연설을 하였는데 대부분 라인란트와 독일 북서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히틀러는 뛰어난 달변가였던 괴벨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는 괴벨스를 풀어놓기만 한다면 전 독일을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를 베를린의 관구장으로 임명했다. 이어 나치당 중앙 선전국장의 직위도 차지한 괴벨스는 나치당의 집권 과정에서, 특히 선거에서 뛰어난 선동의 재능을 발휘한다. 선전국은 히틀러의 직속 조직이었고, 그 덕에 괴벨스는 막대한 예산을 소모함과 동시에 자신의 선전 능력을 막힘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1930년 의회 해산 후 총선에서도 괴벨스는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전국을 돌면서 대중 집회를 이끌었고, 베를린 뒷골목에서 노동자와 빈민들을 대상으로 나치 사상을 선전했다. 괴벨스의 활약 덕분일까, 12석에 불과했던 의석이 107석까지 오르며 나치당은 원내 2당의 자리에 올라섰다. 신이 괴벨스의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바람대로 경제는 점점 파탄 나고 있었다. 유가증권의 가치는 휴지조각이 되어 갔으며 시중은행이 지급불능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을 타 바이마르 체제를 끝장내기 위해 나치당과 공산당이 행동을 같이 했으나, 공산당의 극단적인 폭력 행사 탓에 여론은 공산당에게 적대적으로, 나치당에게 우호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의 설득에 넘어간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가 히틀러 내각을 형성하는 데 동의하면서 1933년 비로소 나치 정권이 탄생하였다. 나치 정권의 탄생과 동시에 괴벨스는 베를린의 정복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바이마르 체제를 절멸시키고 나치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한다.
3. 괴벨스의 연설과 선동 기술 분석
Wollt Ihr den totalen Krieg? Wollt Ihr ihn, wenn nötig, totaler und radikaler, als wir ihn uns heute überhaupt erst vorstellen können?
그대는 총력전을 원하는가? 오늘날 상상도 하지 못할 총력적이고 급진적인 전쟁이 되길 원하는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괴벨스의 선전은 멈출 줄 몰랐다. 독소 전쟁 직전에는 독일이 영국 상륙작전을 시도할 것처럼 선전하기도 했다. 폭탄에 의해 부상당한 국민을 구출하기 위한 구원대를 조직하거나, 중년 남성이나 소년들을 모아 국민 방위대 베어울프를 설립하는 등 선동 외적으로도 국민들의 지지를 결집하는 데 매우 능했다.
나치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하면서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은 완전히 좌절되었으며 세계 대전의 전세가 뒤바뀌게 되었다. 독일군의 병력과 자원이 이 전투에서 지나치게 소모되었고, 반면 소련군은 독일군과 대등한 전력을 갖추게 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참패로 나치의 수뇌부와 정치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괴벨스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전면전의 여론을 형성하려 했다. 괴벨스의 수많은 연설 중 가장 잘 알려진 이른바 “총력전 연설(Total War Speech 또는 Sportspalastrede)”은 1943년 2월 18일 베를린 체육궁전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괴벨스의 대표적인 프로파간다 연설로 여겨지며, 나치 독일과 추축국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본격적으로 밀리기 시작하고 국가를 총동원하게 된 단계에 돌입했음을 드러내는 사료이기도 하다. 괴벨스가 며칠에 걸쳐 손봤던 이 연설은 이례적인 군중 히스테리와 전국 각지에서 라디오로 청취하던 국민의 열광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증오와 망상으로 가득 찬 선전장관이 독일인의 일부를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총동원에 임하도록 고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괴벨스는 연설에서 독일 국방군이 동부 전선에서 밀려오는 위험에 맞서 싸워 내지 못한다면 볼셰비즘이 독일을 집어삼키고 곧 전 유럽도 집어삼킬 것이기에, 독일이 즉각적이고 최종적인 결단(총력전)을 내려야 한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또한 모든 배후에는 전 지구적인 유대인 세력이 존재하며 그들이 볼셰비즘을 통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선동하였다. 무엇보다 소련이 상당한 수준의 국방력을 갖추었음을 강조하며 독일의 전 국민이 참전하고 노동함으로써 총력전에 동참하여야 하며 이에 당 지도부를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함을 역설하였다.
1) 연출적 기술
이 연설의 가장 큰 특징은 청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매우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괴벨스가 긍정적인 내용을 연설할 때는 “만세(Heil)”, “브라보”와 같은 환호를, 혐오적인 내용을 연설할 때에는 “체”, “피”와 같은 야유를 보냈다. 이러한 환호는 일종의 합창 구호와 같았으며 연설의 절정 부분에서 극에 달했다. 이것이 사전에 미리 준비된 것인지에 대해선 논쟁이 있는데, 윌리 A. 보엘케Willie A. Boelcke는 이 정도의 환호는 괴벨스의 다른 연설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며 청중의 일거수일투족이 준비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나치 선전성 직원이었던 프리츠 히터의 진술을 인용하여 청중에 대한 사전 지시는 없었으며, 이는 오로지 괴벨스의 천재적 능력으로 가능케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괴벨스는 체육궁전 내 행사장의 배치와 장식에도 공을 들였다. 장식은 최대한 단순하게 하였고, 중앙에 통로를 만들어 그 끝이 연단을 향하도록 배치하였다. 연단 위에 “전면전-최단기전(TOTALER KRIEG–KÜRZESTER KRIEG)”이 쓰인 표지를 크게 걸어 놓아 청중이 위를 바라보면 이 두 단어가 한 눈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따라서 “청각으로 들려오는 음향과 시각으로 들어오는 기호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반복적으로 주입될 수 있었다. 그는 연설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청중을 선정하는 것부터 적들의 교란 방지를 예방하기 위한 대책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놓았다. 또한 신문 보도, 라디오, 방송, 영화관 뉴스까지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이 연설을 전국에 퍼뜨리고자 했다. 실제로 이러한 매체들은 괴벨스의 프로파간다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2) 어휘적 기술
연설문에 사용된 단어와 세부적인 표현들은 나치의 언어 특성을 잘 나타낸다. 괴벨스는 단어 하나조차도 그에 깃든 여러 의미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연설문에 사용하였으며, 이는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결과로 이어지며 대중의 극단적 감정을 극도로 불러일으켰다. 연설의 절정은 괴벨스가 청중에게 10개의 질문을 던지는 부분인데, 총력전에 대한 청중들의 자발적 동의를 구하는 내용이다. 이 질문들에서 사용된 어휘를 살펴보면, 우선 괴벨스는 유의어들을 다채롭게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glauben(믿다), entschlossen sein(결심을 하다), wollen(원하다), vertrauen(신뢰하다), geloben(맹세하다) 등 의지나 소망, 믿음과 관련된 여러 동사를 사용하면서 청중들의 의지를 한층 더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명사와 형용사의 사용에서도 괴벨스의 의도가 드러난다. 동사 wollen(원하다)는 주로 Krieg(전쟁)과 Sieg(승리)를 가리킨다. 또한 명사 Führer(총통)은 항상 vertrauen(신뢰하다)의 대상으로 두어 명사와 동사가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도록 하였다. 형용사 total(총력의)은 명사 Krieg, Sieg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두 명사는 total뿐 아닌 absolut(절대적인), endgültig(최종적인), ewig(영원한), uneingeschränkt(무제한적인) 등 total과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는 형용사들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주목해야 할 점은 total과 여타 형용사들의 병용이다. 형용사 total은 total erledigt(완전히 지친), total erschöpft(완전히 고갈된)와 같이 다른 형용사와 결합될 때에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여 사용된다. 그러나 나치의 언어 세계의 total은 연결되는 대상에 따라 상반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total은 나치의 적이나 유대인 등의 적대적 대상과 연결될 때에는 부정적 의미를 띠었다. 반면 Krieg나 Sieg와 같이 나치가 중요시하는 개념과 연결될 때에는 필연성과 정당성의 의미를 띠었다.
괴벨스는 관중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인칭대명사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앞서 언급한 10개의 질문을 던지는 때에는 청중을 2인칭 복수 명사인 Ihr(여러분)를 사용하여 지칭한다. 질문이 끝나고 연설의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청중을 1인칭 복수 명사 Wir(우리)를 사용하여 지칭한다. 이는 화자와 청중을 분리하여(2인칭 복수 명사) 청중에게 질문을 던지며 화자의 의견과 일치시키고, 의견의 일치를 확인한 이후에는 이 둘을 묶어(1인칭 복수 명사) 청중과 화자가 하나 되는 효과를 보이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청중은 모두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모이게 되었으며 연설의 설득력은 극대화되었다.
3) 수사적 기술
괴벨스의 연설은 수사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선 고전 수사학 이론에 따르면 연사는 연설이 끝나는 시점에 이르러 청중에게 특정 지식을 전달하거나 청중을 감동시켜 어떠한 행동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수사학자들은 대부분 후자를 더 강조한다. 괴벨스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청중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며 총력전을 향한 적극적 행동을 유도한다. 이러한 점에서 괴벨스의 연설문 구성은 수사학적 이론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설의 절정인 10개의 질문에서 괴벨스의 수사 기술의 우수함을 느낄 수 있다. 괴벨스는 총통에 대한 충성과 신앙고백적 성격의 승리의 다짐을 통해 이것이 전쟁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임을 암시하고 대중 스스로의 책임을 극대화한다. 이를 통해 괴벨스는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청중으로 하여금 반강제적으로 답변을 강요할 수 있었다. 그는 수사학적 기교를 동원하여 적들(연합군)의 주장을 나열한다. 예를 들어 독일의 총력전이 국민의 여론과 반대되는 나치의 독단적 행위라든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로 나치의 패배가 다가왔다는 등의 주장이 있다. 괴벨스는 특히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관련하여 독일 민족의 패배심리를 자연스럽게 자극한다. 다만 그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패배심리를 다시 적에게 투사함으로써 청중을 감정을 반전시킨다.
혹자는 괴벨스의 연설문이 전체적으로 종교적이며 일종의 사이비 장엄문체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괴벨스는 total, radikal(철저한, 급진적인) 같은 어휘들을 활용하여 분위기를 극단적으로 끌고 간다. 이때 10개의 질문은 마치 기독교의 십계명과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청중들은 연사의 질문에 신자들이 사제 앞에서 맹세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충성서약을 하게 된다. 충성서약의 내용 또한 언어적으로 기도문의 성격을 띠는데, 서약에 쓰인 두운법, 두어 첩용, 훈계조의 형식 등이 그 예이다. 여기서 괴벨스 연설의 주체들을 기독교의 주체와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연설 주체 | 기독교 주체 |
괴벨스(연사) | 성직자 |
청중, 독일 민족 | 신자 |
히틀러 | 하느님 |
체육궁전 집회 | 예배 |
10개의 질문 | 십계명 |
연설문 | 기도서, 교리문답 |
4. 결론
요제프 괴벨스의 선동 기술과 탁월한 선전술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참패라는 불리한 전세 속에서도 독일 국민의 여론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그 선동 기술의 중심에는 파시즘 언어(나치 언어)가 존재했다.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 파시즘 언어는 어쩌면 위기의 순간에서 더 크게 빛을 발했는지도 모른다. 전투가 패배하는 순간, 이를 반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전 국민을 단결시키고 총통에 대한 충성을 재차 확인하고자 하는 그의 호소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의 위기상황 속에서 이러한 파시즘 언어나 그와 유사한 언어를 통해 대중을 선동하고자 하는 집단에 대한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변에 괴벨스의 선동 기술을 재현하려는 자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파시즘 언어의 순기능을 적절히 이용할 필요도 있다. 혐오와 정파 갈등으로 점철된 현대 사회에서 대중 설득적인 언어가 순기능적으로 활용된다면 이는 곧 역사학의 본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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