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포스팅을 시작으로 대학에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서양 봉건사 시리즈를 연재해보려 한다.
시리즈의 첫 글의 시점은 본격적인 중세에 들어가기 전인 서기 4세기에서 시작한다.
서기 4세기 말부터 5세기 중반에 걸쳐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 유럽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기 때문이다.
훈족의 압박으로 시작된 민족의 이동은 고트족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 부족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로 밀려들게 만들었고, 이는 로마 제국의 붕괴를 초래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첫 번째 포스팅에서는 훈족과 고트족의 등장부터 로마 제국의 멸망, 그 뒤를 이어 등장한 고트족이 세운 왕국들이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며, 특히 서로마 제국의 붕괴가 단순한 침략이 아닌 복잡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결과였음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훈족과 게르만족의 이동
4세기 말부터 5세기에 걸쳐 훈족은 동로마와 서로마를 압박했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서 등장한 훈족은 유럽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다뉴브강 유역에 정착한 고트족을 밀어내면서 유럽 대륙의 민족 이동을 촉발시켰다. 훈족의 압박은 고트족뿐만 아니라 다른 게르만족들에게도 큰 위협이 되었다.
고트족은 원래 발트해 근처에 살다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동안 다뉴브강 유역에 정착했다. 그러나 훈족의 압박으로 인해 그들은 동로마와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 내로 들어와 정착했고, 서고트족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결국 스페인까지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고트족은 로마 제국과의 충돌과 협력을 통해 서서히 유럽 대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다종족국가의 형성
훈족의 왕 아틸라는 판노니아(오늘날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등을 아우르는 지역)를 점령하며 다종족국가를 형성했다. 아틸라의 궁정에는 로마 귀족 출신의 인물들도 봉사했으며, 고트인, 로마인, 알란족이 섞인 모습을 보였다. 아틸라의 통치는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통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다종족국가의 형성은 로마 제국의 국경지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훈족의 침략과 다종족국가의 형성은 로마 제국의 국경 방어에 큰 도전이 되었다. 로마는 훈족의 강력한 군사력과 유연한 통합 정책 탓에 골머리를 앓았다. 아틸라의 판노니아 점령은 로마 제국의 국경지대를 흔들었고, 이는 로마의 군사적, 정치적 안정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3. 서로마 제국의 군대 철수
로마 제국은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 군사 전략의 변화 등으로 인해 브리타니아, 스페인, 갈리아 지역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는 유럽사회 전반에 엄청나게 큰 변혁을 불러일으켰는데, 지역마다 그 편차도 매우 컸다.
우선 스페인은 현지 귀족들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세 제도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였다.
하지만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영국)와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 서쪽 일부)는 군대 철수 이후 지역 사회가 붕괴했다. 특히 브리타니아는 로마 군대의 철수로 인해 게르만족의 침략에 취약해졌고, 지역 사회는 급격히 변모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부유한 자원 덕에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서로마 제국의 군대가 게르만 장군들을 많이 임용했던 것과 다르게 동로마군은 로마인들로 장군을 구성하였다는 점에도 차이가 있다.
4. 서로마 제국의 붕괴
서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는 이미 5세기 초 서고트족의 수장 알라리크에 의해 점령되었다. 알라리크의 침공은 로마 제국의 군사적 약점을 드러냈고, 게르만인들이 집약적으로 한 번에 움직이던 이 시기에 로마인들은 매 순간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 이후로도 서로마 제국은 침공과 격변의 시기를 거쳐야 했다. 450년에는 훈족의 왕 아틸라가 로마를 침공했고, 455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가 로마를 침공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연속적인 침공은 로마 제국의 군사력과 정치적 안정성을 크게 약화시켰다. 결국 476년 오도아케르가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폐위시키고 이탈리아의 왕이 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사실상 멸망에 이르게 된다.
5.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한 견해
18세기부터 20세기 중엽까지,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유는 매우 명확했다. 당시의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서로마 제국은 고트족의 침략이라는 “대격변”으로 갑작스럽게 멸망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일종의 역사적 단절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이후, 최근 학계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친 민족의 이동과 이주에 의해 수 세기에 걸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최근 견해에 따르면 로마 제국은 단순히 군사적 힘에 의존한 혈연 공동체가 아닌, 복잡한 문화 공동체로서 다양한 민족들을 흡수하고 통합했던 다종족국가였다.
이에 서로마는 476년 이후에도 사실상 그 전통을 계속 이어갔다. 이에 혹자는 4세기~8세기를 Late Antiquity(후기 고대)로 부르기도 한다.(Patrick Geary)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게르만족의 침략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사회적, 경제적 변화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알란족과 고트족은 서로마 제국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일부는 로마 사회에 통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로마는 단순한 군사적 제국이 아닌 문화와 제도의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점진적인 변화와 내부적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초래했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주류 견해이다.
6.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천년 간 제국의 명맥을 유지했다. 동로마 제국이 이런 끈질긴 생존력을 가진 것은 단순한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었고, 지리적인 이점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서로마 제국은 삼면이 모두 국경지대였다. 북쪽으로는 작센족, 동쪽으로는 고트족, 남쪽으로는 반달족의 침입을 끊임없이 겪었고, 이것이 서로마 제국의 약화를 불러 온 것이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다뉴브강 유역의 짧은 국경지대만을 방어하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7. 동고트 왕국의 등장과 멸망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는 동고트 왕국으로서, 테오도릭 치세에 돌입하게 된다. 테오도릭은 로마의 전통과 법을 존중하며 로마 귀족들과 협력했다. 그는 로마의 행정 제도를 유지하고, 로마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테오도릭의 탁월한 치세 덕에 불가피할 것 같았던 게르만과 로마인의 갈등은 효과적으로 억제되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동고트 왕국은 또 다시 고난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테오도릭에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0살에 불과했던 그의 외손자가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새 왕의 어린 나이 탓에 테오도릭의 딸 아말라순타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문제는 아버지를 따라 라틴어 교육을 충실하게 받았던 아말라순타가 어린 왕에게도 라틴어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대다수의 고트족이 동고트 왕국의 로마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트족들의 반감을 산 아말라순타는 결국 살해당했다.
이때, 대혼란의 시기를 놓치지 않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가 535년 동고트 제국을 침공하면서 20년간의 긴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를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라 한다.
540년 동로마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라벤나에 입성하면서 동고트 왕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8. 서고트 왕국의 형성
한편 현재의 서고트족은 415년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해 5세기 중엽 히스파니아(오늘날의 포르투갈, 스페인, 안도라, 지브롤터)를 정복했다.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왕국을 세우며 로마 제국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그들은 로마의 법과 제도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로마인들과의 협력을 통해 안정된 사회를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종교적 갈등이 여전히 큰 문제로 남아 있었다. 고트족은 원래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었으나, 기존에 거주하던 로마인들은 가톨릭을 신봉했다. 이로 인해 고트족과 로마인들 사이에 종교적 갈등이 발생했다. 리우비길드는 가톨릭 주교들을 아리우스파로 개종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그의 아들 레카레도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며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6세기 중엽 서고트족과 로마인을 관직에 함께 등용하면서 종교적 갈등은 봉합되었다. 간신히 서고트 왕국의 안정을 가져오기 바쁘게, 왕위 계승의 불안정으로 인해 지속적인 내란과 암살이 발생했다.
가톨릭과 아리우스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여전히 존재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치고 있던 이슬람을 이베리아 반도로 유인하였다. 이후 이슬람 세력은 711년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9. 결론
오늘의 포스팅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멸망하면서 벌어진 유럽 사회 전반의 거대한 변혁이었다. 수천 년을 더 살아남을 것 같았던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테오도릭 치세의 동고트 왕국 또한 그 명맥을 오랫동안 잇지 못했다. 서고트족 또한 종교적 갈등을 봉합했으나, 정치적 갈등과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 멸망을 피할 수 없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서양 중세사의 큰 축을 이루는 프랑크 왕국의 등장과 분열을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Matthew Innes, Introduction to Early Medieval Western Europe, 300-900. The Sword, the Plough and the Book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7).
홍기원 편역, 『살리카법: 샤를르마뉴 정비본 (Lex Salica a Carolo magno emendata)』 (연세대학교 법학연구원 법사회사센터,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