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사회로, 그 경계와 중심은 항상 고정되지 않았다.
특히 북유럽, 남유럽, 중부 유럽, 동유럽,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등 유럽의 변경 지역들은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상호작용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번 포스팅과 열 한 번째 포스팅에서는 이 변경 지역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그 중 이베리아 반도와 폴란드를 집중적으로 들여다 볼 것이다. 특히 ‘봉건제 혹은 봉건 사회가 이 지역에서 어떤 양상을 띠고 나타났는지’를 중점으로 다루고자 한다.
1. 유럽의 ‘변경 지역’
“변경지역”이란 변방의 경계 지역을 의미한다. 유럽 세계에서의 변경 지역이란 서유럽을 중앙으로 가정하고 보았을 때의 “변경”을 의미하는데, 이는 오늘날에 서유럽 중심주의로 비판받을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따옴표와 함께 표기한다.
봉건 사회를 기준으로 했을 때 이 봉건제라는 특수한 중세의 제도적 형태는 지난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루아르강 북족과 라인강 서쪽 지역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그 이외 지역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파되면서 이식되거나 영향을 주는 형태였다.
따라서 봉건제의 관점에서 북부 서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나머지를 ‘변경’으로 논의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럽의 변경 지역은 크게 네 지역(북유럽, 남유럽, 중유럽, 동유럽)으로 나뉜다. 이 중 중유럽과 동유럽을 통틀어 중부 유럽, 혹은 동유럽으로 부르기도 한다.
북유럽에 속하는 국가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이 있다. 이 국가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서기 1000년 경 전후로 형성되었는데, 모두 바이킹 국가라는 특징이 있다. 바이킹의 민족 이동과 개종에 관해서는 다음 포스팅을 참고하길 바란다.
이들 북유럽 국가들은 모두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파로 개종하였다. 핀란드의 경우는 다른 북유럽 국가들보단 다소 늦게 13세기 이후에 중세사에 편입되었다.
남유럽에 속하는 국가들은 카스티아, 에론, 나발, 포르투갈, 알렌시아 등이 있다. 이들 국가들은 주로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하는데,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남북으로 이슬람 국가와 기독교 국가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도 남유럽에 속하지만 변경지역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중유럽에 속하는 국가들은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가 있다. 중유럽은 독일 국경의 동쪽과 그 바깥쪽 국가들을 일컫는데, 헝가리는 마자르족이 세운 나라이고, 폴란드와 오늘날의 체코 지역인 보헤미아는 서슬라브족의 국가였다.
키예프 대공국과 모스크바 대공국은 동슬라브족의 국가였다. 동슬라브 국가들의 특징은 동방정교회로 개종했다는 점이다.
남쪽의 발칸반도 지역의 종교와 문화는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지역은 로마의 속주 지역으로서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을 받았고 그 이후에는 오스만의 영향을 받았다. 이 지역을 남슬라브라고 한다.
2. 북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의 개종
북유럽과 동유럽으로의 기독교 전파는 중요한 변화였다. 9세기 중엽부터 11세기 중엽까지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등은 기독교로 개종하며 새로운 정치 구조를 형성했다.
이 시기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사들에 의해 슬라브인들은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하였는데, 그 중 폴란드와 보헤미아(서슬라브)는 가톨릭이었고, 특히 보헤미아는 신교도로 개종하는 등 열정적인 가톨릭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북유럽과 동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이교도의 개종이 이루어지면서 이들 국가의 정치 구조가 변화하였다. 가장 큰 특징은 뒤늦은 봉건 제도의 도입인데, 서유럽의 전형적인 봉건 제도와는 차이가 있었다. 동유럽 지역에서는 서유럽보다 농노제가 더 오랫동안 지속되어 19~20세기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3. 북유럽 국가들의 봉건제
프랑스의 봉건화는 10세기에 시작되었고 11세기 앙셀륄망(영토의 파편화)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반면 덴마크는 11세기 말부터 봉건화가 시작되었다. 덴마크의 왕들의 군사적 봉사의 대가로 신하들에게 봉토를 하사하기 시작했다. 덴마크는 대륙에 붙어있고, 독일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북유럽 국가 중 가장 먼저 서유럽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덴마크 봉건제의 특징은 봉토가 세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애초에 봉건제는 스칸디나비아 왕국들에서 지배적인 제도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애초에 귀족들의 세력 기반이 왕이 하사한 봉토가 아닌 사유지였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귀족들은 왕에게 봉토를 받은 후 왕권이 약해지자 사유화한 것이고, 북유럽의 귀족들은 본래 가지고 있는 사유지에 추가적으로 봉토를 하사받은 것이다. 또한 이 봉토는 왕이 마음대로 회수할 수 있었다.
서유럽의 봉건제와 봉건 사회에 관해서는 다음 포스팅을 참고하길 바란다.
북유럽에서의 영주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사법권이 개인에게 귀속된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회조차도 봉토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덴마크의 농민들은 17세기 이전까지 완전한 농노 상태에 있지 않았다. 동유럽은 15~16세기에 이르러서야 ‘재판농노제’라고 하는 뒤늦은 노예제를 도입하였다. 도입된 이후에도 100년 정도만 지속되었고 이후 농노들은 해방되었다.
북유럽에도 기사와 견습기사(종자) 제도가 존재했기에 군사적으로도 서유럽의 봉건제와 같은 성격을 띤다고 볼 수 도 있으나, 북유럽의 기사 제도는 유럽 대륙 국가들만큼 발전하지는 못했다.
특히 스웨덴은 호수나 하천이 많고, 위도도 높았기 때문에 굳이 북유럽까지 정복하러 보는 이들은 많이 않았다. 따라서 이 지역의 농촌 생산 관계는 기사들에 의해 봉건화되지 않은 것이다. 특히 스웨덴은 중세 말까지도 자유농민층이 전체 경작지의 전반 이상을 차지했다.
4. 고대와 중세의 이베리아 반도
다음 그림은 13세기에 제작된 중세 스페인의 필사본 삽화이다. 이 삽화는 중세 스페인의 사회와 문화를 잘 드러내고 있다. 삽화 속 왼쪽 인물은 유대인이고, 오른쪽 인물은 터번을 쓴 무슬림이다. 다시 말해 중세의 이베리아 반도는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고대의 이베리아 반도는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정복한 것은 로마인들이었다. 이들은 공화정 시대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였고 이 지역을 ‘히스페니아 속주’로 불렀다. 하지만 고대 로마 제국 말기에 서로마제국이 약화하면서 409년부터 동쪽에서부터 이동해 온 서고트 종족이 갈리아 지역을 거쳐 이베리아 반도로 침입하였다. 이후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지역을 점령하고 서고트 왕국을 건설하였다. 보통 이 시점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중세사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서고트 왕국은 본래 아리우스파를 믿고 있었으나, 587년 레카르도 왕이 기독교도 개종하면서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의 모든 방식을 차용한 것은 아니었고, 서고트 고유의 종교 의례를 갖추었다. 11세기 로마 교황청에서 로마식 전례를 이베리아 반도에 부과하면서 비로소 같은 형식의 의례를 차용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교황의 권력이 점차 강화하면서 교황이 로마식 미사를 유럽 각 지역에 명령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서고트 왕국이 711년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하였을 때 잔류 병력은 북서쪽으로 퇴각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웠다. 이에 기독교인들의 왕국은 여러개로 분화되었고, 이후 수백 년 동안 저번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레콩키스타(Reconquista), 즉 재정복전쟁(718~1492)이 일어났다.
레콩키스타가 벌어진 기간에 이베리아 반도가 항상 전쟁 상태였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슬람인들끼리, 기독교인들끼리 싸우기도 했으며, 두 세력이 동시에 위기에 쳐했을 때는 힘을 합쳐 외부 세력에 대항하기도 했다. 공존과 싸움이 병존했던 것이다. 이슬람 세력은 마지막 거점이었던 그라나다가 멸망하면서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사라졌다.
재정복전쟁을 완수한 국가는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 왕국이다. 이 연합 왕국은 1516년에 막을 내리는데,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 해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연합 왕국은 스페인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5. 재정복 시대의 이베리아 반도
1) 서기 1000년 경의 이베리아 반도
위의 지도는 재정복전쟁이 시작될 시기, 1035년의 이베리아 반도를 담은 것이다. 서고트 왕국이 멸망했을 당시 잔류 기독교 병력이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에 세운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기 1000년 경 레온(León)와 카스티야(Castilla)로 분열되었다. 그 외 여러 나바라, 포르투갈, 아라곤 등 여러 기독교 왕국들이 수립되었고, 이들리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가 복잡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1세기 초 기독교인들의 왕국은 대부분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와 북쪽에만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세력이 상당히 미약하였고, 지도에 보이는 것처럼 반도의 대부분을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때 지도에 초록색으로 표시된 이슬람 지배 지역을 “알 안달루스(Al-Ándalus, لأندلس)”라 한다.이 알 안달루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랍인들이 물러간 이후 스페인 남부 지방을 지칭하는 안달루시아의 어원이 되었다.
본래 아랍인들이 756년 이베리아를 정복하며 세운 아랍 국가는 “코르도바 아미르국”이었다. 코르도바 아미르국은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를 통틀어 지배했던 “우마이야 칼리프국”의 제후국이었다. 그런데 우마이야 칼리프국이 멸망하게 되면서 잔존 세력이 코르도바 아미르국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929년 코르도바 아미르국은 칼리파국을 잇는다는 명목 하게 929년 코르도바 칼리파를 수립하였다.
코르도바 칼리파국은 1031년 멸망하였는데, 이미 1008년부터 여러 도시 국가들로 난립하여 세력이 약화하고 있었다. 이 도시 국가들을 타이파(Taifa)라 한다. 이들은 서로 내전을 벌이고 기독교와 싸우기도 하면서 복잡한 양상을 전개하였다. 한편, 북쪽의 기독교 국가들에서도 내전이 존재했으나, 이슬람 국가들 간의 대규모 내전은 이들에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되었다.
타이파 중에선 톨레도 타이파가 가장 막강한 세력을 자랑했다. 톨레도는 당시 여러 문화, 철학, 과학 등의 중심지로 유명했는데, 이곳에서 많은 아랍 문헌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후 재정복 전쟁에 의해 톨레도가 함락되면서 수많은 문헌들이 서유럽 기독교 세계에 소개된 것이다.
2) 11세기의 이베리아 반도
11세기 초부터 서유럽 기독교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의 재정복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분원이 이베리아 반도에 설립되면서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의 북부로 유입되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봉건 사회의 폭력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주창한 ‘신의 평화’, ‘십자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던 때이다. 이에 11세기 프랑스의 기사들과 순례자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모여들게 되었다.
‘신의 평화’ 운동 관련한 이야기는 아래 포스팅에 담아 놓았다.
1018년부터는 프랑스 원정군이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많은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베리아 출신의 기독교도들이 전쟁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타이파국은 서로 단합하기 못하고 지속적으로 분열하면서 기독교 세력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1072년 레온과 카스티야가 알폰소 6세에 의해 통합되었고 기독교 진영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기세를 몰아붙여 1085년, 기독교 세력은 최대 타이파인 톨레도를 함락시켰다 이 시기에 서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전쟁을 선언하였다. 톨레도의 함락에 놀란 다른 타이파의 통치자들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왕국인 알 모라비드(Los almorávides, المرابطون)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알 모라비드는 북서부 아프리카에 세워진 베르베르인의 국가이다. 알 모라비드의 지도자는 상당히 호전적인 성전인 지하드(جهاد)를 추진하였는데, 무력을 써서라도 이슬람의 신앙을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후 약 50년 간 알 모라비드는 수많은 성전을 벌이며 북서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이때 1085년 톨레도가 함락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타이파들로부터 지원군을 요청받게 된 것이다.
이에 알 모라비드에서 지원군을 이베리아 반도에 파견하였고, 1086년 이슬람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알폰소 6세는 큰 부상을 입고 전장을 겨우 탈출하였다. 그런데 알모라비드 원군의 수장은 칼끝을 돌려 타이파 왕국들을 멸망시켜 나갔다. 이에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은 결국 알 모라비드 왕조에 의해 통합되었다. 북쪽은 여전히 레온과 카스티야 주도 하에 여러 분열된 기독교 왕국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렇게 11세기 말의 이베리아 반도는 남쪽에는 알모라비드 제국, 북쪽에는 레온-카스티야, 아라곤, 발렌시아가 주도하는 것으로 세력이 개편되었다. 이 중 발렌시아를 이야기 할 때에는 스페인의 영웅이었던 엘 시드를 빼놓을 수 없다.
엘 시드는 레온과 카스티야가 통합되던 시기 알폰소 6세와 대립하면서 그에게 추방당했는데, 이후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타이파국 중 하나에 위탁하여 다른 타이파를 타파하였다. 이슬람인들에게 존경받은 전사가 된 엘 시드는 카스티야로부터 고향으로 복귀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그는 정복했던 타이파 지역을 모두 받는 조건을 걸고 이를 수락하였고, 그렇게 그 지역에 ‘발렌시아’가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발렌시아는 엘 시드가 사망한 이후 이슬람 세력에 의해 다시 멸망하였다.
3) 12세기의 이베리아 반도
12세기가 되면서 포르투갈이 독립 왕국으로 출현하였다. 포르투갈은 본래 레온 왕국에 속한 백작령이었는데, 1139년 레온의 알폰소 엔리케(Afonso Henriques)가 교황의 봉신으로서 직접 포르투갈 왕의 칭호를 받으며 독립 왕국이 된 것이다. 이후 1147년, 이슬람 세력의 영역이었던 오늘날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을 십자군 군대와 레콩키스타 세력이 연합하여 함락시켰다.
한편 1146년엔 새로운 강력한 이슬람 교도인 알 모하드(Los almohades, الموحدون)가 알 모라비드를 대체하였다. 그렇게 12세기 중엽에는 이슬람 지역을 알모하드 왕조가, 기독교 지역을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포르투갈이 지배하는 판도로 다시 개편되었다. 1137년에는 아라곤과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통합하면서 아라곤 연합 왕국을 형성하고 레콩키스타에 박차를 가했다.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였고, 중세 후기까지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이었다.
1147년, 북아프리카에선 알 모하드가 알 모라비드를 완전히 대체하게 되었고, 이에 알 모하드 왕조가 수립되었다. 이들은 카스티야에 정복되었던 이슬람 세력의 지역을 대부분 탈환하였다. 1195년에는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기독교군이 이슬람에게 대패하였다. 쓰라린 패배 이후 기독교 세력은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17년 후 레콩키스타의 절정을 이루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1212년 7월에 벌어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는 카스티야, 포르투갈, 아라곤, 나바라, 그리고 십자군에서 활약한 성전 기사단이 연합한 기독교 연합 세력과 알 모하드 왕조 간에 벌어진, 레콩키스타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기독교 세력이 대승을 거두면서 이베리아에서의 무와히드 왕조의 패권은 붕괴하였다.
4) 13세기의 이베리아 반도
이제 이베리아 반도에 유일하게 남은 세력은 남부의 그라나다뿐이었다. 그라나다는 카스티의 봉신국이 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기독교 왕국 중에서는 아라곤 연합 왕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카스티야는 내륙에 위치해 비교적 해상 진출이 힘들었기에 상대적으로 아라곤이 크게 성장한 것이다. 아라곤은 바르셀로다 백작령을 통합하면서 지중해를 면했고, 리콩키스타를 통해 남쪽 영토를 획득하면서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아라곤 연합 왕국은 1229년 마요르카를 정복하였는데, 마요르카는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도서 지역 중 하나로 이때 왕국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1283년에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를 정복하였다. 이후 몰타와 제르바를 포함한 도서 지역을 지속적으로 획득하면서 아라곤 연합 왕국은 북아프리카 진출의 발판을 마련해 나갔다. 이렇게 아라곤 세력이 지중해로 팽창하면서 해상 무역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13세기 말에 이르러 왕국은 지중해의 주요 세력으로 떠올랐다.
6. 이베리아는 ‘변경 지역’이었나?
이베리아는 ‘변경 지역’인가? 다시 말해 군사적 정복에 의해 봉건 제도의 군사 제도, 주종 관계가 이베리아에 이식되었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일부 지역은 그렇다 동시에 가톨릭 교회 제도의 이식과 확장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베리아 반도에는 다른 기독교 지역과는 다른 특징이 있었다. 바로 기독교와 무슬림이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공존하였다는 점이다. 더불어 유대인 또한 15세기 말까지 공존하였다. 글 중반에 첨부한 유대인과 무슬림이 체스를 두는 필사본 삽화에서 이런 특징이 드러난다.
이렇게 여러 민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 인구과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력이 새롭게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은 대부분 무슬림이었고, 인력이 부족했기에 이들을 쫓아내지 않고 공존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다른 프랑스를 포함한 다른 지역의 유럽인이나 유대인들을 이베리아 반도로 유입시켰고, 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각종 혜택을 부여해야 했다. 따라서 이 지역에 서유럽식 농노제나 장원제가 성립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시기 유대인들은 자유로운 신분은 아니었으나, 유대교를 자유롭게 믿으며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대인과 무슬림에 대한 관용 정책을 ‘콘비벤시아(Convivencia)’라 한다. 이 콘비벤시아가 바로 이베리아 반도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1492년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아라곤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유대인을 모두 추방하였고, 17세기에는 무슬림까지도 완전히 추방하였다.
이베리아 반도는 지역별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다시 말해 서유럽의 기준(봉건제도라는 관점)에서 본 ‘변경 지대’라는 규정이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지역에 적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7. 이베리아 반도의 봉건제
그럼 이베리아 반도의 봉건제가 지역별로 어떻게 다르게 존재했다는 걸까? 우선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카롤루스 대제가 정복했던 지역으로, 카롤루스 대제는 이 지역에 바르셀로나 변경백령을 세웠다. 바르셀로나는 서프랑크 왕국과 프랑스의 역사 및 정치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프랑스 남주의 봉건적 정치 상황에 깊이 개입하였다. 이에 바르셀로나에는 프랑스를 모델로 하는 봉건제가 주로 발전하였다.
아라곤 왕국에서는 통합하기 이전까지 봉건제가 존재하긴 했으나, 그 봉건적 위계가 프랑스만큼 고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이 지역에서의 봉건제는 아라곤 귀족들이 왕이 하사한 봉토를 보유하는 형태로만 존재했다. 이 귀족들은 프랑스처럼 왕의 지배에 벗어나 난립하지 않았고, 왕의 직속 봉신으로 남아 있었다. 왕은 권력을 유지하면서 봉신들에게 땅을 나눠주거나 회수하는 권력을 발휘했다.
카스티야, 레온, 포르투갈은 봉건제가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 다만 군사적 봉사의 대가로 왕의 신하가 봉토를 받는 등 봉건제의 형식 자체는 존재했다. 이들과 더불어 동시에 봉신들과 비슷한 무기와 장비를 갖춘 농민 전사도 존재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농노제는 이슬람 세력에 의한 정복 여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이슬람 세력에 한 번도 점령되지 않은 지역은 비교적 서유럽식의 농노제가 자리잡았으며, 그렇지 못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봉건제가 약하게 자리잡았다. 한편 레콩키스타로 수복한 지역에는 자유농과 노예제가 존재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중부 유럽과 폴란드의 중세사를 다룰 것이다.
핵심 질문
1. 레콩키스타와 신의 평화, 십자군의 관계는 어떠한가?
2. 북유럽 국가들과 이베리아 반도의 봉건제 및 농노제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지역의 봉건제와 농노제는 서유럽 국가와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