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중부 유럽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교차하며 정치, 종교, 경제적으로 복잡하고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중부 유럽과 폴란드의 슬라브족 분포, 폴란드 중세사, 독일 기사단의 활동, 그룬발트 전투, 그리고 봉건제와 농노제의 확산 등을 다루어 본다.
1. 슬라브족의 지리적, 문화적 구분
슬라브족의 구분은 동쪽, 서쪽, 남쪽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그 밑으로 세부적인 구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세 지역별로 뚜렷하게 다른 특징들이 나타났다. 이 중 동부 유럽과 북부 유럽을 묶어 중부 유럽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슬라브 국가로는 폴란드, 보헤미아(체코), 슬로바키아가 있다. 이들은 라틴 알파벳을 사용하며 가톨릭 혹은 프로테스탄트를 주로 믿었다. 서슬라브 국가의 사람들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는데, 시대에 따라 독립적이거나 종속적이기도 했다. 이 중 폴란드가 비교적 독립적이었으며, 보헤이마가 종속적이었다.
동슬라브(루스/루시) 국가로는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있다. 이들은 키릴 문자를 사용하며 정교회를 믿었다. 이들의 문화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에 정교회로 개종한 것이다.
남슬라브의 국가들은 주로 발칸 반도에 위치하며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이 있다. 이 지역은 고대 로마, 비잔티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다양한 언어와 문자가 혼재되었고,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정교, 이슬람 등이 혼재된 복합적인 종교 구조를 갖추었다.
인근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은 위치상으로는 중부 유럽이나, 서유럽에 속한 것으로 본다.
2. 중부 유럽의 개종
독일의 선교사들은 10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가톨릭을 전파에 힘을 썼다. 특히 10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1세는 기독교 전파를 기독교 황제의 의무로 생각했고, 이는 황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중부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개종한 국가는 894년 개종한 보헤미아 왕국이었다. 폴란드는 966년 보헤미아의 가톨릭 공주와 결혼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폴란드의 왕은 대주교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주교가 아닌 교황의 봉신으로 서임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폴란드 공작을 서임하는 주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아닌 교황이었다. 이에 보헤미아 지역보다 폴란드가 비교적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자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폴란드는 종교적 자유를 허가했고, 이에 박해에 시달리며 거주지를 옮기던 유대인들이 14세기 대거 유입되었다. 중세 후기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으면서 폴란드에 거주할 수 있었다.
헝가리는 왕이 985년 개종하면서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이렇게 서기 천년 경이 되면 중부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3. 11~12세기의 폴란드
폴란드의 국명인 ‘폴스카(Polska)’의 어원은 폴란드어 ‘Pole’이다. Pole은 밭, 또는 평평한 땅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폴스키는 밭사람을 이르는 용어이기도 하다.
폴라니인들은 8세기에 그니에즈노를 중심으로 정착하다가 9세기에 느슨한 지역적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이후 966년 부족을 통합한 미에츠코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이로써 폴란드는 서유럽 문화권에 편입되었고, 피아스트 왕조가 수립되어 1385년까지 그 명맥을 이었다.
1000년 경 폴란드는 독립적인 대주교구를 설치하였고, 신성로마제국의 대주교구에서 벗어나 황제와의 독자적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적인 폴란드 교회를 갖게 되었다. 이후 1025년 피아스트 왕조의 볼레스와프 왕(Bolesław I Chrobry)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폴란드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폴란드의 왕은 교황의 직속 봉신이었기 때문에 11세기 후반 서임권 투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폴란드의 왕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맞서 교황을 지지했었다.
12세기에는 피아스트 왕조가 약화하면서 왕실의 친척인 대귀족들이 활보하였고, 폴란드는 여러 개의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따라서 힘이 약해진 시기의 폴란드는 1157년, 신성로마제국의 패권을 인정해야 했다.
이 시기 폴란드에 독일 변경백들이 침입하였다. 13세기에는 독일 기사단인 튜튼 기사단과 몽골이 침입하면서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14세기 후반에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연합으로 보다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폴란드는 종교적, 문화적으로 서유럽에 속하며, 몽골 제국과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서유럽의 동부 최전선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종교, 문화, 역사의 측면에서는 동유럽보다는 서유럽에 속한다. 따라서 이들은 서유럽의 동부 최전선에서 몽골, 오스만 제국에 대항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4. 13~14세기의 폴란드
13세기의 폴란드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226년 독일 기사단(튜튼 기사단)의 동방 식민 활동, 1240년 몽골인(타타르인)의 침공, 1264년 유대인들에 대한 자유헌장 부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폴란드인이 아닌 타민족과 연관된 사건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13세기의 폴란드의 역사는 타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간의 역순으로 해당 사건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폴란드의 이민 정책과 관용 정책
중부 유럽은 서유럽에 비해 인구가 부족했다. 폴란드 전체가 서유럽의 대도시 하나보다도 작았을 정도였다. 이에 농민이 대부분이었고, 폴란드는 수공업자와 상인들을 독일에서 유입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오늘날 폴란드에는 독일계 폴란드인이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한편 폴란드는 유대인들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유대인 집단은 십자군 초기부터 탄압 받았다. 처음엔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이 이들을 보호해주었으나, 스페인이 통일되면서 추방되었다. 영국에서도 13세기 말에 유대인들을 추방하면서 이들은 정착할 곳을 찾아 유럽 전역을 돌아다녀야 했다.
반면 폴란드는 1264년 유대인들에게 자유헌장을 부여하면서 유대교를 자유롭게 믿을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이에 독일과 보헤미아의 유대인들과 에스파냐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폴란드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도시에 주로 거주하면서 상인과 수공업자로 활동하였다. 폴란드 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의 유입을 반대했으나, 군주들은 이들을 보호해주었다. 폴란드에서 유대인들은 자유민은 아니었으나, 재산을 자유롭게 소유하고 이동의 자유를 누렸다.
2) 몽골인(타타르인)의 침입
폴란드인은 몽골을 ‘타타르(Татарлар)’로 불렀다. 하지만 타타르와 몽골은 엄밀하게 다른 개념이다. 타타르족은 볼가강과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유목 민족으로, 13세기 몽골 제국에 복속되면서 유럽 정벌에 참여하였고, 이에 몽골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들은 1240년부터 폴란드에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12월 말 1만 명의 부대가 폴란드로 진격하였다. 이들은 수 개월 만에 수도인 크라쿠프를 점령하고 약탈하면서 폴란드를 초토화하였다. 1241년 4월 9일에는 레그니차 전투에서 폴란드군이 패배하였다. 당시 폴란드의 한 영주가 독일 기사단과 함께 기독교 세력을 모아 맞서 싸웠으나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레그니차 전투 이후 몽골군이 폴란드에서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몽골 제국의 칸이 병으로 앓아 누우면서 황제 계승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14세기가지도 폴란드는 몽골의 간헐적인 침공을 겪었다. 이에 폴란드는 14세기 중엽 몽골에 조공을 바치면서 타협하였고 이후 몽골의 침략을 줄어들었다.
3) 독일 기사단(튜튼 기사단)의 침입
1190년, 제3차 십자군 시기에 결성된 독일 기사단은 몽골보다도 더 긴밀하게 폴란드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독일인들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한 것은 12세기부터이나, 독일 기사단이 폴란드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226년이다. 당시 폴란드 영주 콜라트는 기사단에서 땅을 나눠주면서 북쪽의 이교도들을 정복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제안한다. 이에 기사단은 12세기 독일 영주들의 식민 정책을 이어받아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들은 이후 프로이센과 리보니아(Livonia) 지역을 점령하는데, 이때부터 독일 역사에 프로이센이 편입되었다.
그런데 1386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이 들어서면서 폴란드와 기사단 사이의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결국 1410년 그룬발트에서 두 세력이 부딪히게 된다. 그룬발트 전투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이 독일 기사단은 오늘날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으나, 이들이 폴란드에 긍정적 기여도 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선 독일 기사단은 폴란드에 발전된 건축술을 전파하였고, 현재도 그 영향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이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리엔부르크(말보르크) 성인데 현재에도 폴란드 최고의 아름다운 성으로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선진적인 영농기술을 전파하였으며, 동서 교역망 구축하고 도시를 건설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5. 그룬발트 전투
1410년 7월 15일, 그룬발트 전투는 중세 최대 규모의 전투 중 하나로, 폴란드, 리투아니아, 타타르 연합군이 독일 기사단과 맞붙었다. 이 전투는 독일 기사단과 리투아니아 사이의 영토 분쟁에서 비롯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1411년 토룬 협약을 통해 종결되었다.
그룬발트 전투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바로 이 전투에 대한 폴란드와 독일의 해석과 기억이 다르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그룬발투 전투를 “독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폴란드 민족의 저항을 상징하는 전투”로 기억했다. 또한 외세의 침략을 종결시키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 독일은 그룬발트 전투를 “슬라브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투”로 기억했다.
폴란드에선 폴란드가 튜튼 기사단에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내용의 소설 <십자기사단>이 영화화 되기도 했는데, 이는 서독의 수장인 아데나워가 독일 기사단의 명예 회원이 되면서 반발하고자 제작된 것이다.
이처럼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민족주의 시대에 그룬발트 전투는 독일 민족과 폴란드 민족(슬라브족)의 전투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폴란드와 독일에서 각자의 해석을 주장하며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유럽연합 시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역사적 기억과 해석이 등장한다. 2004년 폴란드가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독일과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였고, 2010년에는 그룬발트 전투 600주년을 기념하며 양국이 민족주의 기억을 해체하고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룬발트 전투의 양상은 어땠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룬발트 전투는 독일 민족과 폴란드 민족간의 전투가 아니었다. 독일 기사단 진영에는 독일 기사단과 서유럽의 십자군 원정대 외에 폴란드인과 체첸, 체코 등지에서 온 슬라브인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진영 또한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 타타르인, 체코인, 모라비아인 외에 독일인들도 포함되었다. 따라서 실제로도 그룬발트 전투의 양 진영은 애초에 다국적 진영이었던 것이다.
6. 중부 유럽에서의 봉건제 확산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등 중부 유럽 전역에 봉건제가 확산되었다. 봉토의 수여로 중앙 권력이 약화되었고, 대귀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에 강력한 힘을 얻게 된 대영주들은 지역을 분할하고 할거하였다. 포스팅 초반에 12세기 경 피아스트 왕의 힘이 약화하고 왕실의 친척들이 대귀족들이 활보했다고 언급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그 시점이다.
봉건제가 전형적으로 나타난 프랑스 중북부와 독일 서부에서는 봉건제와 농노제가 결합되어 나타났으나, 중부 유럽과 같은 그 외의 지역은 봉건제의 외형을 갖추더라도, 농노제는 존재하지 않고 자유농이 존재하는 등, 지역에 따라 다른 사회경제적 현상이 영주와 농민 사이에 나타났다. 특히 중부 유럽 지역에서는 ‘재판농노제’라는 독특한 형태의 농노제가 뒤늦게 나타났는데, 뒤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7. 독인인들의 식민 활동과 한자 동맹
한편 독일의 영주들은 독일 기사단과 함께 활발한 식민 활동을 전개하였다. 독일 기사단은 교회로부터 자신들이 정복한 영토를 봉토로 수여받았고, 이후 주교구로 병합하였다. 이들인 식민 활동을 전개한 지역에서는 뤼벡과 레벨(오늘날의 탈린) 같은 새로운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독일인들은 스칸디나비아와 동슬라브 지역과의 무역을 독점하였고, 이 지역에서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한자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또한 많은 농민들을 이주시켜 정착시키고자 했고, 농노들에게 억압을 가하지 않으면서 부역을 면제하고 세습 입대를 허용하는 등 갖가지 혜택을 제공했다. 서유럽에서 이주한 농민들이 독일인들의 땅에서 좋은 대우를 받자, 슬라브의 토착 농노들의 대우도 함께 향상되었고 이에 농민들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상승하였다. 중부 유럽의 군주나 상층 귀족들 또한 독일인들의 이주 정책을 지지했는데, 이러한 정책이 자신들의 수입 증대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의 식민 활동은 15세기 초에 이르러 종결되었다.
8. 중부 유럽의 농노제
11~13세기의 독일 동쪽 지역에선 이 지역으로 이주한 농민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영주에게 부역을 제공하지 않고 세습 임대로 토지를 보유하였다.
그런데 14부터 농민의 지위가 약화하고 농노제와 영주의 억압이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귀족들은 14세기 농민들의 이주의 자유를 금지하고 부역을 강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자유로운 소농이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대규모 영지를 형성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민의 토지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 시기 프로이센과 폴란드에서는 “융커”라는 엘리트 지주 계층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이 도시에서 도망친 농노를 받아들이는 것을 금지하면서 농노들은 영지에서 도망쳐 새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15세기부터는 농노에 대한 예속이 더욱 강해지면서 ‘재판(再版)농노제’가 등장하였는데 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14세기 이후 인구가 급감하였다. 당시 중부 유럽은 인구에 비해 토지가 광활했기 때문에 인구 감소에 대한 경제적 위기를 크게 체감하였다. 곡물의 가격이 하락하였고 임금이 증가하였다. 또한 대규모 흑사병 또한 발병하면서 설상가상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영주은 인구 감소와 농민의 도주에 직면하면서 농민들을 땅에 결박하는 정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산업 구조적인 문제도 존재했다. 잉글랜드와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 등은 양모 산업으로 산업 위기를 타개했으나, 중부 유럽은 농업 집약도가 낮은 산업으로 발전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노동력을 적게 요하는 다른 종류의 농경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신흥 도시들의 활력이 소멸된 것 또한 주된 원인 중 하나다. 발트해 지역의 신흥 도시들은 서유럽의 도시들과는 달리 13세기 이후 활력이 소멸되었다. 이에 프로이센과 보헤미아의 도시들 및 리보니아 도시들에서 농노제 도입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지만 영주에게 진압되면서 실패하였다. 보헤미아에서는 15세기 후스파가 패배하면서 자유 도시들이 몰락하였다.
이러한 이유들로 재판농노제가 확립되면서 농노가 도망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16세기에는 폴란드, 프로이센, 러시아, 보헤미아, 그리고 리투아니아 등 중부 유럽 및 동유럽 지역에서 재판농노제가 확고하게 정착하였다. 이 당시 농민들은 이주의 자유를 박탈당했고 토지에 속박되었다. 진정한 장원 경제의 재출현이었다. 이 지역에서의 농노제는 18~20세기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9. 한자 동맹 도시들의 쇠퇴
한자 동맹 도시들이 쇠퇴한 것은 영주가 대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상인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한 것에서 기인한 문제이다.
영주들은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외국의 상인들과 직접 거래하려 했고 이에 공산품 제조권과 가격 결정권을 점유하였다. 그렇게 영주 계급은 점차 상인화되었다.
그렇게 중부 유럽 전체에서 도시와 중간 계층이 쇠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외국 상인들과 지주 계층이 밀착하면서 단치히와 리가만 등의 도시를 제외한 발트해 상업 도시들이 몰락하였다. 도시가 귀족의 지배 하에 들면서 발트해 연안 지역에서는 철저한 도시 소멸 정책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농노들이 다른 도시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도시들의 몰락은 동유럽에서 농노제가 확립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중세의 도시들에 관해 다룰 것이다.
주요 질문
1. 독일 기사단과 폴란드의 관계는 무엇인가?
2. 중부 유럽의 재판농노제가 등장한 원인과 그 양상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