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봉건사 시리즈 / 12. 중세 도시

중세의 도시는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역동적인 현장이었다. 이러한 도시는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에도 그 명맥을 이어가며 다양한 경로로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키비타스와 카스트룸이라는 두 가지 주요 유형의 도시는 중세 도시의 형성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이는 이후 중세 도시의 복잡하고 다양한 발전 양상으로 이어졌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중세 도시의 기원과 형성, 변화와 발전, 봉건사회와의 관계, 십자군과 이탈리아 도시들의 발전, 농업혁명과 도시 발전의 연관성을 중점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1. 중세 도시의 기원과 형성

중세 도시의 기원은 주로 키비타스와 카스트룸이라는 두 가지 형태였다.

키비타스(Civitas)는 로마 시대에 기원을 둔 도시로 대표적인 예로 파리, 로마, 밀라노 등이 있다. 주로 종교적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다. 키비타스의 가장 큰 특징은 주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중세 초부터 키비타스는 ‘주교 도시’였다.

로마 제국 말기에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키비타스를 성벽으로 둘러쌌으며, 이 성벽은 중세 교회의 교구 경계를 설정하는 기준이었다. 키비타스는 교회 조직의 기반이자 주교구의 중심이었다. 게르만 왕국 시대에도 키비타스 체제는 교회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카롤링거 시대에는 군사적, 행정적, 종교적 중심지로 떠올랐다. 9세기부텆는 주교구 및 주교 도시와 동의어로 쓰였다.

반면 카스트룸(Castrum)은 부르구스(Burgus)라고도 불리며, 군사적 목적으로 설립된 도시이다. 카스트룸은 주로 봉건제후에 의해 축조된 요새지이자 성주령의 중심지었다.

이슬람 세력이나 노르만인들, 인접 지역의 제후들에 대한 방어의 필요성에 의해 성벽과 해자가 갖춰진 군사시설로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도시의 성격을 갖추지 못했으나 이후 행정적 기능이 추가되었다.

9세기에는 대수도원에서 요새화된 성곽을 축조하여 부르구스로 변모하기도 했다. 10세기에 지방 영주가 난립하면서 앙셀륄망이 일어났고, 봉건제후는 성벽 주위의 일정 지역에 대한 재정권과 사법권을 성주에게 위임하였다. 이에 영주는 해당 지역의 징세와 사법을 관할하였다. 애초에 왕이 수행하지 못하던 업무들을 봉건 제후들이 도맡고 있었는데, 이를 영주들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중세 봉건 도시들의 특징 중 하나는 화폐의 독립적인 주조이다. 당시 각 지역의 영주들은 화폐를 각자 발행하였다. 같은 단위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순도와 무게가 달랐기 때문에 화폐의 가치도 덩달아 차이가 났다. 따라서 이 시기 환전상들은 이를 비교해 적절한 가치로 서로 다른 화폐를 환전하는 일을 수행하며 산업에 일조하였다.

 

2. 중세 도시의 변화와 발전

7세기부터 8세기 중엽(메로빙거 시기)까지는 일부 주교좌 도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이 소멸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8세기 중엽 카롤링거 시대에 새로운 주교 관구들(Bishopric, Metropolitan)이 등장하면서 도시가 재형성되기 시작했다.

9세기 중엽에는 바이킹이 칩입하면서 주교관구, 키비타스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되었다. 함부르크는 834년에 새로운 주교 관구로서 형성됐지만, 9세기 중엽 바이킹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도시와 주교 관구가 파괴되었다. 9세기 중엽 이후 10세기에 이르면서 새로운 카스트룸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함부르크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키비타스와 카스트룸은 완벽하게 이원화되지는 않았다. 이 둘은 지역마다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는 새로운 도시들이 등장하며 중세 도시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함부르크는 바이킹의 침입으로 파괴된 이후에 1189년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제국자유도시가 되었으며, 13세기에는 한자 동맹에 가입하여 자유도시 겸 한자동맹 도시로 번영하였다.

프로방스는 카스트룸으로서, 바이킹 시대에 건설되었다. 파리와 밀라노는 고대 로마 때부터 존재하여 오늘날까지 존속하였다. 함부르크의 경우 주교관구로서 건설됐지만, 파괴된 이후 다시 번영한 제3의 형태이다.

11~12세기 상인들은 방어시설을 갖춘 키비타스나 카스트룸 주변에 모여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유럽 북동쪽 지역을 포함한 동유럽 지역의 도시들은 기독교화와 더불어 성립되었으며, 이들은 기독교 도시의 ‘핵’이었다. 11세기 이후 유럽 전체에서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상업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는 도시인지 불분명한 성채에 불과했는데, 상인들이 모여 큰 도시를 형성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9~10세기의 도시의 핵이 된 성채는 영주나 주교가 세웠으며, 11~12세기에 이르러 상인들이 성채 옆에 모여 살면서 방어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이다.

중세 도시의 발전에는 농업혁명이 큰 기여를 했다. 10세기 이후 기후 조건이 좋아지면서 온난한 시대(Warm Period)가 도래하였고, 이는 13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기후 변화는 농업 혁명을 가져왔고, 생산력 증가와 농업 기술의 발전을 초래했다.

특히 이 시기에 이탈리아 도시들이 크게 성장하였다. 십자군 이전부터 베네치아와 같은 도시들은 성장을 이루고 있었는데,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13세기에 이르러 육상과 해상 교역이 모두 가능해지면서 이들은 전성기를 맞았다.

심경 쟁기의 사용, 삼포제, 방아와 풍차 사용, 가축을 이용한 다양한 마구의 발전, 외바퀴 손수레 사용 등 기술적 발전은 농업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다. 그 결과, 재배 작물의 다양화와 전문화, 경작지의 확대와 집약농업, 인구 증가가 이루어졌다. 이는 상업의 부활과 도시 발전으로 이어져 중세 도시들의 성장을 촉진했다.

 

3. 샹파뉴 정기시

샹파뉴 정기시
샹파뉴 정기시

샹파뉴 백작은 프로뱅을 포함한 샹파뉴 백작령 전체에서 시장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상인들과 그들의 거주지를 보호해주면서 동시에 시장세와 관세를 부과하였다. 또한 각기 다른 도량형을 직접 환전해주면서 환전세도 부과하였다.

백작이 정기시를 만든 이유는 상인들이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 북부 지역으로 이동할 때 샹파뉴 지역을 꼭 거쳤기 때문이다. 이에 샹파뉴 지역에 큰 시장을 열어 상인들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도한 징세 등으로 시민들이 불만을 갖기 시작하였고 코뮌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코뮌 운동을 뒤에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4. 중세 도시와 봉건제의 관계

전통적 견해에 따라 중세 도시는 봉건영주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간주되었으며, 봉건제의 해체에 기여했다고 여겨졌다.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중세의 도시는 봉건제의 ‘밖’에 존재함녀서 봉건제의 해체에 기여하였고, 시민들이 영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코뮌 운동을 벌이고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또한 황제는 영주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들을 지원하였으며 이는 곧 영주와 부르주아(+의 뒷배로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는 국왕 세력)의 대결 양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중세 도시를 봉건사회의 일부로서 봉건영주와 타협하며, 봉건적인 사회구조에 통합된 것으로 바라본다. 오늘날의 해석에 따르면 중세 도시는 영주와의 타협을 통해 공존하면서 세금을 납부하였고, 동시에 일정 수준의 자치권도 획득하였다.

11세기 말부터 12세기에는 상인 길드, 부르주아 도시민들이 주도하는 자치권 획득 운동인 코뮌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알프스 이북 지역에서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 서약 공동체(상인 길드/수공업자 길드)를 형성했다. 이들 중 부유한 상인들이 시정과 시참사회를 구성하고, 봉건적 지배층을 배제하며 자치권을 획득했으나, 세금은 납부하였다. 상인과 수공업자 모두 길드를 형성했지만, 상인이 수공업자 위에서 하청을 주는 형태였기에 위계는 존재했다.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에서는 도시 귀족과 가신들이 코뮌의 구성원이 되었다. 시민과 도시 귀족이 융합되어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도시국가가 크게 발전하였다. 중앙 권력이 부재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5. 신성로마제국의 도시

자유도시제국 중 하나였던 뉘른베르크
자유도시제국 중 하나였던 뉘른베르크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영주지배도시’와 ‘자유제국도시’라는 두 가지 유형의 도시가 있었다.

영주지배도시(Landstadt)는 종교 영주(주교, 수도원장)와 세속 영주의 지배를 받았다.

반면 자유제국도시(Freie und Reichsstädte)는 황제로부터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언제나 간섭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종교 전쟁 시기와 같은 중요한 때에는 크고 작게 도시 운영에 관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이 약해질 때는 더 큰 자치권을 누렸다. 바젤, 아우크스부르크, 스트라스부르, 쾰른 등이 자유제국 도시에 속했다.

중세 도시는 근대 도시의 원형이 되었으며, 경제적 중심지로서 시장과 상품 생산 기능을 제공했다. 또한 정치적 역할을 하여 행정과 정부 제도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지적, 문화적 중심지로서 도시학교와 대학 설립, 성당 건설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6. 십자군과 이탈리아 도시들의 발전

1) 제노바와 피사의 발전

제노바와 피사는 해상을 통한 십자군의 보급과 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안 도시들의 함락에 기여하며, 십자군 전사들과 순례자들, 보급물자를 예루살렘의 라틴 왕국으로 운송했다. 이를 통해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십자군 국가들의 설립과 존속에 기여했다.

제노바와 피사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거점을 마련하여 라틴 왕국의 시장에 자유롭게 출입할 권리를 얻었다. 이를 통해 다마스쿠스 등의 도시에 비단, 설탕, 향신료 등의 교역 거점을 확보하고, 큰 이익을 올렸다.

2) 베네치아의 부상

중세 베네치아 지도
중세 베네치아 지도

다른 도시들에 비해 베네치아는 더욱 빠르게 발전하였는데, 그 이유는 십자군 이전 10~11세기부터 비잔티움 제국과의 교역을 해왔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실크와 같은 상품을 유럽 다른 도시에 공급하는 도매상 역할을 해왔으며, 그만큼 국제 교역의 중심지로서 이미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제4차 십자군을 계기로 베네치아는 ‘해상 제국’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과 함께 비잔티움 제국을 점령하고, 제국의 8분의 3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이는 베네치아 상선이 지나가는 지역의 영토를 확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베네치아는 13세기 이후 해외 식민지 건설을 위해 노력하며, 제노바와의 경쟁을 통해 에게해와 아드리아해의 여러 섬들과 항구 도시들을 장악했다.

3) 십자군 이후의 새로운 교역로

1291년 십자군 왕국의 마지막 거점 도시이자 베네치아 상인들의 중요한 교역 시장이었던 아크레가 맘루크 제국에 함락되면서 교역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맘루크 제국은 이탈리아 상인들과 교역을 계속하기를 원했으나, 교황이 이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교역로와 교역 중심지가 등장했다. 몽골제국의 영토인 흑해 연안이 새로운 대안 시장으로 부상하였는데, 몽골의 평화 시대에 이들은 아시아로 진출하여 직접 교류하면서 몽골 제국과 교역하였는데, 이를 “칭기스의 교환”이라 한다.

한편 키프로스 왕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을 통한 밀무역이 성행했다. 키프로스로 피신한 기독교 상인들이 맘루크 제국에서 들여온 상품을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재판매하는 중계 무역이 성행하였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중세 유럽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흑사병 팬데믹을 다룰 것이다.

서양 봉건사 시리즈 / 13. 흑사병

 

주요 내용

1. 중세 도시의 기원, 형성, 발전

2. 중세의 도시와 봉건사회의 관계

3. 십자군과 이탈리아 도시들의 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