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 중 하나로, 중세 유럽 사회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흑사병은 14세기 중반, 유럽 인구의 1/3 이상을 목숨을 앗아가며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구조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흑사병의 발생과 양상, 전파 경로와 사회적 환경, 문화적, 심리적 영향, 사회적, 경제적 변화, 치료법, 건강지침서 등 흑사병에 대한 이야기 포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1. 흑사병의 발생과 양상
흑사병(Black Death)은 14세기 중세 유럽을 강타한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당시 유럽 인구의 약 1/3 이상이 목숨을 잃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흑사병의 확산 경로는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실크로드는 기원전 5세기 이미 지중해 지역에 천연두를 확산시킨 전례가 있으며, 165년 로마에서도 천연두가 발생했다. 14세기 페스트 역시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바닷길을 통한 확산은 540년 유스티니아누스 역병과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전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병은 쥐벼룩에 상주하는 병원균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arsina pestis)가 중간 숙주인 쥐를 통해 인간에게 감염되면서 발생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부패한 공기로 인해 병이 감염된다는 미아스마(Miasma) 이론이 정론이었다.
미아스마 이론에 따르면 병의 감염은 호흡을 통해 이루어진다. 히포크라테스가 이를 최초로 주장하였으며, 이후 중세 의학의 기본을 만드는 데 기여한 갈레노스가 강조하였다. 실제로는 균을 가진 야생의 쥐들이 인간 사회에 분포한 쥐들과 접촉하였고,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인간에게 옮게 된 것이다.
2. 유럽 전파 계기 논란
흑사병의 발생 원인과 유럽 전파 경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는데, 특히 가브리엘레 데 무시스(Gabriele de Mussis)의 기록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
무시스는 몽골인들이 1345년부터 1347년까지 지속된 카파 공성전(Caffa Siege) 중에 흑사병에 감염된 시체를 성 안으로 투척했다고 주장했다. 제노바인들은 성 안에 퍼진 흑사병을 피해 배로 탈출했는데, 이는 최초의 생물학전 혹은 세균전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몽골군의 장례 관습 및 전염병 대처법과 상충되는 기록으로 인해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당시 몽골군은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에 접근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했다. 심지어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신이 있는 텐트를 완전히 봉쇄하고 그 앞에 창을 꽂아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다.
또한 몽골군과의 평화협정이 체결된 1347년 초까지 제노바인들은 흑사병으로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체에는 벼룩이 기생하지 않기 때문에 시체를 던짐으로써 페스트를 옮길 수 없다. 따라서 몽골군의 이러한 전략은 세균전이 아닌 심리전에 가까웠다.
다른 연구에서는 지중해의 곡물 무역이 흑사병 전파의 주요 경로였음을 시사한다.
3. 사회적 환경
페스트가 유럽에 전파된 사회적 환경은 우선 높은 인구 밀도이다. 당시의 조밀한 주거 환경은 페스트가 전파하는 데 매우 적합한 환경이었다. 또한 위생에 대해 무지했기에 감염자의 침대보나 옷을 재사용했고, 이는 흑사병의 빠른 전파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수도원도 페스트 전파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당시에 농촌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고, 이에 농촌의 수도원은 페스트균이 농촌으로 확산되는 통로가 되었다.
4. 문화적, 심리적 영향
흑사병은 단순히 생물학적 재앙에 그치지 않고, 중세 유럽 사회에 깊은 문화적, 심리적 영향을 미쳤다. 특히 병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이는 중세인들의 기이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채찍질 고행자들(Flagellants)이 있다. 이들은 특이한 복장을 입고 프로페션(종교 행렬)을 했는데, 상의를 탈의하고 온몸에 채찍질을 하면서 유럽의 여러 도시를 순회했다. 이들은 북유럽과 독일을 거쳐 프랑스 아비뇽까지 순회했는데, 이때 교황도 행렬에 참여했다.
그런데 이들은 지나치게 광신적이었으며 유대인 공동체를 학살을 주도하였고, 이에 클레멘스 6세가 유대인 보호령을 내리게 된다. 클레멘스 6세는 푸배한 교황이었으나, 그 이면엔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다.
이러한 공황 상태는 종종 향락주의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죽음의 춤(Totentanz)”, “죽음과의 체스 게임”과 같은 죽음과 관련된 모티브가 예술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5. 종교적 영향
종교적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신과의 직접적 접촉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신비주의 신봉자들이 등장했다.
또한 흑사병의 창궐로 성직자 계층이 급감하면서 성직자들의 수준이 하락했고, 이는 교회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교회에 대한 적대감의 확산을 초래했고,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염병에 심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의식과 상징 발전했다. 특히 프로페션의 경우에는 원래 존재했던 의식이지만 흑사병 시대에 특히 유행하였는데, 반면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은 거주하는 지역에 역병이 생기면 먼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본래 종교행렬을 주도하던 세력은 주교였다. 프로페션이 주교의 권력을 보여주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세기에 이르러 교황조차도 도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이때의 종교행렬은 “시민 종교”의 일환이 되었다. 이후 역병 시기가 아니더라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종교행렬을 조직하고 수행하게 되었다.
종교적 상징으로는 성 세바스티아누스와 성 로쿠스(로크)가 페스트와 같은 악성 전염병을 막아주는 수호 성자로 숭배되었다. 성 세바스티안을 그린 그림을 보면 르네상스가 이전에는 신체의 고통을 직관적으로 묘사했으나, 르네상스가 도래한 후에는 직관적인 상처나 손상보다는 심미성을 추구하는 그림이 유행하였다.
6. 사회적, 경제적 영향
흑사병은 중세 유럽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우선 인구 감소로 인한 노동력 부족은 장원 경제의 붕괴를 촉진했다.
지주들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부역을 강요했으며, 이는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반란과 같은 농민 봉기로 이어졌다. 농노는 점차 소작농으로 전환되었고, 농업 노동자가 등장했다. 시민 반란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농업 생산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인클로저 운동과 양 사육 증가가 대표적인 사례로, 이는 특히 잉글랜드에서 두드러졌다. 이러한 변화는 농업 생산의 효율성을 높였지만,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7. 흑사병의 원인에 대한 당대인들의 해석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하였다. 첫 번째는 신의 진노에 의한 것으로, 인간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 신이 벌을 내린 것으로 생각했다.
두 번째로 중세인들은 흑사병의 원인을 점성학과 천문학으로 해석하였다. 12세기 르네상스 이후 아랍 문화를 통해 7~8세기 단절됐던 천문학이 다시 소개되면서 천문학과 점성학이 함께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다. 천문학자들은 동시에 점성학자로서 활동하면서 별의 움직임으로 미래를 점치고자 했다. 이 당시 프랑스에서 등장한 유명한 예언가가 바로 노스타라다무스이다.
이 천문학과 점성학이 흑사병과 관련이 있었던 이유는 당대인들이 천체의 배열에 따라 부패한 공기가 생성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흑사병의 발병 원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348년 흑사병이 발병했을 당시 필리프 6세는 의과대학에 역병의 원인 분석을 의뢰했고, 의과대학의 답변은 천체의 특수한 배열로 인해 생성된 유독한 공기가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공기 중에 퍼지는 유독한 기운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이론, ‘미아스마’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공기 전파설로도 불리는 미아스마 이론은 중세 이슬람 의학에서도 수용되었는데, 이는 의학서뿐 아니라 백과사전이나 여러 역사서에도 등장할 만큼 상식적으로 알려진 이론이었다.
또한 중세인들은 체액과 관련해서 흑사병의 원인을 해석하였다. 이를 ‘체액이론’이라 하는데, 체액이론에 따르면 몸에는 총 4가지의 체액이 존재하며, 이 체액들이 서로 균형을 이뤄야 몸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균형이 깨질 경우에는 흑사병과 같은 질병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흑사병 환자의 가래톳에서 체액을 빼내면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병이 없는 사람의 피를 거머리 등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뽑기도 했다.
8. 중세인들의 대처 방법
우선 중세인들도 흑사병은 치료가 어려운 질병임을 알고 있었기에, 치료법보단 예방법을 중요시했다. 도시를 아무리 깨끗이 청소하거나 외부 사람들을 막아도 흑사병의 발병을 막는 데에는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내세운 예방법은 역병이 일어난 장소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해독제 등 약물을 사용하거나 건강지침서를 활용해 대처하기도 했다. 이는 뒤에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9. 기 드 숄리악(Guy de Chauliac)의 흑사병 대처법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주치의였던 기 드 숄리악은 아비뇽에서 역병이 돌았을 당시 도시에 남아 환자를 치료했다. 물론 이는 자발적인 봉사 정신이 아닌 불명예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당시 숄리악이 작성했던 문헌에는 흑사병에 대한 예방법과 치료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숄리악 또한 역시 흑사병의 치료법보다 다음과 같은 예방법을 중요시했다.
1. 신속하게 흑사병이 발병한 지역을 떠날 것
2. 알로에 알약으로 몸을 정화할 것
3. 정맥 절개술로 혈액을 빼낼 것
4. 화염으로 공기를 정화할 것
5. 테리아카, 과일 및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으로 심신을 안정시킬 것
6. 아르메니아 진흙을 먹어 체액을 안정시킬 것
7. 신맛이 나는 것으로 부패를 방지할 것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아무 효과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방법들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숄리악을 또한 흑사병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1. 피를 빼낼 것
2. 구토제를 섭취하여 구토할 것
3. 코디얼 시럽(Syrupy Cordials)을 섭취할 것
4. 가래톳에 반죽을 붙여 가래톳이 터진 후에 치료할 것
(가래톳이 터지면 부항을 뜨거나 절개할 것)
10. 테리아카(theriaca)
테리아카는 고대부터 사용된 해독제로,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갈레노스는 70가지 재료를 혼합하여 테리아카를 제조했으며, 간질, 두통, 편두통, 후두염, 흉부 질환, 관절염, 천식, 복통, 염증, 황달, 신장 결석, 결장 질환, 역병 등 다양한 질병에 효능이 있는 약물로 인식되었다. 특히 흑사병의 예방약이자 치료약으로 각광 받았다.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Μιθραδάτης Στ’ Εὐπάτωρ)가 독에 내성을 갖고자 이 테리아카를 섭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11. 건강 지침서의 등장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질병의 위험을 줄이고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서가 14세기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건강 지침서는 갈레노스 의학서의 아랍어 번역본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서유럽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로, Arnaldo de Villanova가 아라곤 왕 자우메 2세를 위해 저술한 ‘Regimen sanitates'(1306-1307)가 있다. 이와 같은 건강 지침서는 주로 사회의 상층 계급을 대상으로 하였다.
1348년 이후에는 의사들의 저술과 실제적인 위생 조치 사이에 상호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의사들의 저술이 건강지침서에 반영되면서 실제 위생 조치에 이런 저술이 반영되었다.
14~15세기 동안 건강 지침서는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었다. 이들 지침서는 공기의 환기, 음식과 음료, 수면과 비수면, 운동과 휴식, 배출(evacuation)과 채움(repletion), 정신적 안정을 중요시하였다.
12. Tacuinum Sanitatis
Tacuinum Sanitatis는 11세기에 아랍어로 저술된 건강 지침서 ‘Taqwîm as-Şinha’의 번역본이다. 라틴어를 못 읽는 이들을 위한 책이었기에 그림은 최대한 크게, 글자를 짧게 만들었다. 원본에는 없는 여러 작물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탁티아눔 사니타티스가 번역된 시기는 불확실하다. 적어도 1266년 이전에 제작된 책이 현존하고 있으며, 현재 베네치아 마르치아나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따.
이 지침서는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도 의사 이븐 부틀란(Ibn Butlān)이 저술했으며, 의사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다. Tacuinum의 어원은 ‘Taqwîm’으로, 이는 ‘Tables of Health’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중세 후기 봉건사회의 동요와 변화에 관해 다룰 것이다.
주요 내용
1. 흑사병은 중세 봉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2. 1346년경 카파 공성전에서 몽골군은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체를 투척하는 전술을 사용했는가?
3. 보카치오와 기 드 숄리악은 페스트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4. 14~15세기 유럽인들은 페스트 치료, 예방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