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봉건사 시리즈 / 14. 봉건사회의 동요와 변화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는 수 세기 동안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해왔지만, 12세기 후반부터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시작된 사회경제적 변화는 봉건적 질서를 뒤흔들며 새로운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도시와 시장의 발전, 화폐 유통의 활성화, 그리고 농업 혁명 등 다양한 요인들이 맞물려 봉건사회의 동요를 초래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로 중세 말기 유럽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그로 인한 봉건제도의 변화, 주요 반란들을 통해 봉건사회의 동요와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서유럽의 사회경제적 변화

서유럽의 중세 사회는 12세기 후반부터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도시와 시장의 발전, 그리고 화폐 유통의 활성화로 인한 교환 경제의 성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교환 경제의 성장은 화폐 경제의 확대로 이어져 영주와 농노, 주군과 봉신 사이의 관계 변화를 야기했다. 이전의 봉건적 주종 관계는 점차 금전적 관계로 변모했으며, 이는 봉건사회의 기반을 뒤흔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장원제는 농노가 부역의 의무를 지는 고전 장원 체제에서 현물이나 화폐로 지대를 부담하는 순수 장원 체제로 변모하였다.

 

2. 장원제와 농노제의 변화

중세 중기의 농업혁명은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켜 부역 대신 현물과 화폐로 영주에게 지대를 지불하는 금납화 현상을 촉진했다. 이에 농노들은 기존의 부역 대신 현물과 화폐로 영주에게 지대를 지불할 수 있었다.

또한 잉여 농산물을 시장에 판매하면서 영주와 농민 모두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부유해졌다. 이렇게 화폐 경제가 성장하면서 지주와 농민 사이의 인적 종속 관계는 점차 느슨해져 갔다.

이로 인해 농노의 신분 상승이 가능해졌고, 자유로운 토지 소유와 이주가 가능해지면서 새로운 농민 계층인 요맨(Yeoman) 등 소농민 계층 및 임금 노동자가 등장했다​. 중유럽과 동유럽 지역에서는 13세기까지 자유농민이 발전하다가 14세기부터 농민의 지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9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장원제와 농노제의 변화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9~11세기 – (서유럽) 순수 장원 시대
12~13세기 – 유럽 전 지역 봉건제 확산 (봉토 매개의 봉건적 주종 관계의 확산 – 지역 상이)
12~13세기 – (독일 동부, 중유럽) 식민활동
13세기 – (중유럽) 농노들의 신분 상승
14세기 – (서유럽) 농노들의 신분 상승
14세기 – (중유럽) 농노들의 신분 하락
16세기 – 잉글랜드 농노제 폐지
16세기~18세기 – (중유럽) 재판농노제
20세기 초 – 러시아 농노제 폐지

 

3. 중세 후기 농업 경제와 농촌의 위기

14세기 초부터 봉건사회는 농업 경제와 농촌의 위기 시기로 접어들었다.

인구 감소, 경제 쇠퇴, 기후 변화, 전쟁 등 다양한 원인이 이 위기의 근간을 이루었다. 1400년을 전후로 인구 증가가 둔화되면서 가용 경작지에 압박이 가해졌고, 이는 한계지까지의 개간을 불러왔다.

14세기 초의 추운 기후와 잦은 흉년은 농업 생산의 급격한 감소와 가축 유행병의 증가를 초래했다. 이러한 기후 변화는 1315-1317년 대기근으로 이어져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고 빈곤이 증가했다. 대규모 전쟁으로 인한 기근 발생도 중세 후기 농촌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과 기근, 대규모 전염병인 흑사병은 경제적 위축의 시기를 만들어냈다.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와 농민의 농촌 이탈은 곡물 가격의 하락과 임금 상승을 야기했고, 이는 지주들의 수입 감소로 이어졌다. 농산물 가격은 지역에 따라 급등하기도, 급락하기도 했다. 두 현상 모두 경제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서유럽의 영주들은 농민들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다. 일부 영주들은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거나 관용 정책을 펼쳤지만, 다른 영주들은 봉건적 억압을 강화하며 반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봉건적 반동의 강화는 서유럽 지역에서는 실패하였지만, 동유럽과 중부 유럽에서는 성공을 성공을 거뒀고, 결국 이 지역에 재판농노제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15세기부터는 새로운 농업 생산 방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여러 지역에서 소작제가 도입되었으며, 잉글랜드는 인클로저와 양을 사육하기 시작하였다.

 

3. 주군과 봉신의 관계 변화

중세 후기에는 주군과 봉신 간의 관계도 큰 변화를 겪었다. 참전의 의무가 있는 기사들이 봉건적 봉사를 화폐로 대납하기 시작하면서 영주들은 이 화폐로 용병을 직접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주종 관계는 개인 간의 인적 관계에서 금전적 관계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적 가치와 사회 현실 사이의 괴리를 발생시켰다.

또한 십자군 원정을 떠났던 많은 귀족들이 자신의 땅을 담보로 잡아 경비를 마련했는데, 이를 갚지 못해 수많은 땅을 귀족이 아닌 다른 계층들이 획득하게 되었다. 중세 후기에는 기사도 문학이 발전하고 기사도 정신을 외치는 이들이 많았으나, 그만큼 돈을 추구하는 배금주의가 팽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13세기부터 유럽의 자본주의가 등장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중세 후기 전쟁 양상도 변화했다. 15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국왕이 군대의 봉급을 지급하는 상비군이 등장했다​. 100년 전쟁을 겪으면서 프랑스 왕은 봉건 영주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고, 자신의 직속 군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에게 봉급을 지급해야 했기에 조세 제도를 정비하게 되었고, 그렇게 프랑스가 절대 왕정으로 가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4. 중세 후기 봉건사회 주요 반란들

중세 후기는 다양한 반란이 빈발한 시기였다. 14세기 초 페스트 발병 이전부터 플랑드르의 반란(1323-1328)이 일어났다.

이후 14세기 중엽부터 잉글랜드의 와트 타일러의 반란(1381), 프랑스의 에티엔 마르셀의 반란(1358)과 자크리의 봉기(1358), 보헤미아의 후스 혁명(1410-1415), 카탈루냐의 농민 반란(14세기 말) 등이 발생했다​.

1) 와트 타일러의 반란(1381)

와트 타일러의 반란
와트 타일러의 반란

와트 타일러의 반란은 과도한 세금 부과에 대한 잉글랜드 동남부 지역 평민들의 납세 거부와 봉기에서 비롯되었다.

반란의 지도자인 와트 타일러와 존 볼은 농노 해방, 농노제 폐지, 국왕 측근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이 반란은 반봉건적, 반교권적 성격을 가진 농민들의 저항 운동으로, 정부와 사회 체제 전반에 대한 도전이었다​.

존 볼은 당시의 상황을 이와 같이 평가했다.

아담이 땅을 파고 이브가 실을 자을 때 도대체 젠틀맨(gentleman)이 어디 있었단 말인가?
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

2) 에티엔 마르셀의 반란 (1358)

프랑스에서는 1358년 파리의 부르주아지(시민계급)가 에티엔 마르셀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에티엔 마르셀은 오늘날의 파리 시장에 해당하는 파리 상인 조합장으로, 삼부회를 통해 왕권을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세금 징수의 개혁, 삼부회의 정기적 소집, 화폐 개주 중지 등을 요구하며 자크리의 봉기와 결탁했다.

3) 자크리의 봉기 (1358)

‘자크리’는 프랑스 농민을 통칭하는 말로, 자크리의 봉기는 프랑스 북부 보베지에서 시작된 농민 반란이다.

자크리의 봉기는 흑사병과 백년 전쟁의 영향으로 일어났다. 귀족과 교회를 공격하는 반봉건적, 반교회적, 반체제적 성격을 띠었다​.

4) 후스파의 반란 (1419)

후스 전쟁
후스 전쟁

보헤미아에서는 후스의 개혁 운동과 후스파의 반란은 중세 후기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보헤미아는 개혁의 요구가 가장 과격하게 나타난 곳 중 하나이다.

후스파의 반란은 후스의 사후 1419년 후스 추종자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후스 운동은 종교적 운동이 반봉건적 민족주의 운동과 결합된 성격을 가졌다. 이는 처음에는 최소한의 개혁 요구를 교황에게 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이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받는 민족적 교회에 의해 지도되는 종교 전쟁으로 변화했다.

후스 운동에는 교회와 교회의 재산에 대한 통제를 바랐던 귀족과 부르주아지에 의해 지지된 개혁 운동과 타보르파 민중의 급진주의가 공존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중세의 르네상스를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