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포스트에서는 살리카법을 통해 프랑크 왕국의 사회상을 살펴보았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962년 오토 1세의 황제 대관부터 1806년 8월 프란프 2세의 퇴위까지, 독일 국가 원수가 황제의 칭호를 지녔던 시대의 독일 제국인 “신성로마제국”에 관해 알아볼 것이다.
1. 프랑크 제국 분할 이후의 상황
이전 포스팅에서 프랑크 제국의 분열을 이야기하면서 글을 마쳤다. 프랑크 제국이 삼분할되면서 분할된 각각의 국가에서 각기 다른 왕조가 들어섰다.
동프랑크(오늘날의 독일)는 오토 1세가 962년 대관식을 가지면서 오토제국(Ottonian Empire)이 들어섰다. 오늘 다룰 신성로마제국이 바로 이 오토 제국이다. 서프랑크(오늘날의 프랑스)에서는 987년 카페(Capet) 왕조가 들어섰다. 서프랑크가 프랑스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190년 필리프 2세가 국명을 개칭하면서부터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편의상 카페 왕조가 들어서는 시점부터를 프랑스라고 칭한다.
로타링기아는 동프랑크과 서프랑크의 중간에 끼어 두 국가의 영토 확장을 위한 각축지가 되었다. 이 지역은 메르센 조약을 통해 두 국가에 흡수되었고, 이탈리아 북부에선 도시 제후들이 세력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2. 카롤링거 제국의 혼란기
9세기 중엽의 프랑크 제국은 혼란기를 겪으며 약화하고 있었다.
우선 지난 포스팅에서 이야기했던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들이 권력 투쟁을 하면서 내부적인 세력 소모를 초래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프랑크 제국을 혼란하게 한 것은 외부 민족의 침입이었다. 몽골족에 속하는 헝가리의 기간(基幹) 종족인 마자르족부터 이슬람, 바이킹의 침입이 하루가 멀다하고 제국의 안위를 위협했다.
동프랑크에서는 바이에른의 변경백이 마자르족에 맞서 싸웠다. 대표적인 전투로 907년의 브라티슬라바(오늘날의 프레스부르크)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변경백은 마자르족에게 대패하였다. 이 시점부터 점차 갑옷이 두꺼워지고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955년에 오토 1세가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완전히 격파하면서 동프랑크가 외부 침입으로 위협을 겪는 시대는 잠시 막을 내기게 된다.
브라이언 타이어니(Brian Tierney)는 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8세기와 9세기 초에 걸쳐 서유럽에서 서서히 힘겹게 발전해 나온 문명은 대침입의 시대에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반면 프랑스 사학자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서유럽의 변화를 “새로운 유럽의 탄생”으로 평가하며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크 제국이 약화한 것에는 이견이 없다. 880년부터 각 지역에 백작들이 난립하면서 왕권이 급격히 약화하였다. 9세기 중엽에는 황제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백작들은 성탑과 성채를 쌓으면서 스스로 독자적 권력을 구착하였다. 10세기 샤를마뉴 시대가 완전히 종식한 이후에는 공작을 자처하는 백작까지 등장하였다. 봉건사회의 초기 형태가 성립된 것이다.
동프랑크에서는 오토 1세가 즉위할 때까지 백작들이 성채를 쌓았다. 반면 서프랑크에서는 카페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봉건화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고, 이는 12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3. 신성로마제국
일반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은 962년 오토 1세의 황제 대관부터 1806년 8월 프란츠 2세의 퇴위까지 독일 국가 원수가 황제의 칭호를 지녔던 시대의 독일 제국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신성로마제국이 카롤루스의 제국을 계승했기에 카롤루스 대제가 즉위하는 때를 신성로마제국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 중 하나는 신성로마제국의 긴 공위 시대(황제가 존재하지 않은 시기)이다. 오토 1세 즉위 전후의 단절성을 강조한다면 신성로마제국의 공위시대 전후도 다른 제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의 공위 시대는 상당히 길었는데, 1차 324년, 2차와 3차는 100년 이내이다. 하지만 오토 1세의 즉위 전후로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는 황제 선출 방식의 차이이다. 카롤루스 대제 시기에는 철저한 혈통주의 상속이었다면, 오토 즉위 이후에는 세습과 더불어 제후들의 선출이 또 다른 기준으로 적용되었다. 또한 황제의 실권도 달랐는데, 카롤루스 대제와 달리 오토 1세는 황제의 권위를 바탕으로 제후들의 봉토나 통치권을 회수하거나 나누어주었다.
이런 논란이 존재하기 때문에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을 신성로마제국과 구별하여 “카롤루스 제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서기 천년 경의 제2차 민족이동과 “신의 평화”운동에 관해 다룰 것이다.
주요 질문
1. 프랑크 제국 분열 이후의 상황은 어땠는가? – (제2차 민족이동과 그 이후의 새로운 판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프랑크 제국의 분열 이후 황제가 없던 시기 – 외적(특히 마자르족)을 물리치면서 영웅이 된 오토 1세가 962년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국이 등장하였음.
황제가 없을 때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던 제후들은 12세기 들어 영국과 프랑스에 중앙집권적 국가가 들어서면서 쇠퇴하였음.
2. 신성로마제국이란 무엇인가?
962년 오토 1세의 황제 대관부터 1806년 프란츠 2세의 퇴위까지 독일 국가 원수가 황제의 칭호를 지녔던 시대의 독일 제국
3. 중세의 역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왜 계속 이탈리아에 집착했는가?
이탈리아에 대한 종주권 + 교황과의 관계 때문이었음
황제 대관을 받기 위해선 교황과의 관계가 중요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