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천년 경은 서양 중세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 그 이유는 제2차 민족이동과 신의 평화운동이 전개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서기 천년 경 제2차 민족이동이 일어난 경위와 과정, 결과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이와 더불어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확대된 교회 개혁 운동, “신의 평화” 운동에 대해서도 알아볼 것이다.
1. 제2차 민족이동 – 이슬람 세력의 위협
서기 천년을 전후하여 대규모 이동을 감행한 민족은 대표적으로 이슬람, 바이킹, 루스, 마자르 등이 있다. 그 중 이슬람 세력은 9세기 초반부터 이탈리아 남부의 섬인 시칠리아를 공격하였다.
이들은 9세기 내내 전투를 지속하면서 끝내 시칠리아를 정복하였다. 본래 이 시칠리아 지역은 비잔티움 제국이 다스리던 땅이었다. 이슬람 세력은 11세기 말 노르만족(바이킹)이 정복하기 전까지 시칠리아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노르만족의 이동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이슬람 세력은 이탈리아 본토를 침략하여 거점을 잡고 주기적으로 로마를 위협하였다. 다만 영구적 정착지를 만든 것은 아니고, 약탈과 복귀를 반복하는 형태였다. 이들은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그리고 프랑스 남부의 론(Rhone)강의 삼각주 지역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점차 확장해 나갔다.
2. 마자르족의 위협
마자르족은 오늘날 헝가리인의 원류가 되는 중앙아시아의 알타이 계통 종족이다. 이들은 895년 헝가리 평원에서 아바르족(Avars)과 합류하였다. 아바르족은 러시아 남서부 민족으로 오늘날 러시아 연방 내 인구 수 6위를 차지한다.
아바르족은 7세기부터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하였는데, 마자르족과 합류한 이후로는 900년부터 수십 년 동안 바이에른과 작센 등 동프랑크 지역을 침략하고 약탈하였다. 이때 일어난 대표적인 전투가 저번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브라티슬라바(프레스부르크) 전투이다.
이들은 937년에는 동프랑크뿐 아니라 서프랑크 왕국의 랭스까지 공격했다. 이곳은 서프랑크 국왕이 대관식을 거행하던 곳으로 서프랑크의 심장부였기에 타격이 컸다. 하지만 955년 레이펠트(Lechfeld) 전투에서 오토 1세에게 대패하면서 헝가리로 물러나 마자르족 왕국을 건설하였다. 985년 마자르족의 Géza 왕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프랑크족과 마자르족의 갈등은 봉합되었다.
3. 바이킹의 위협
북유럽에 살았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바이킹은 8세기 말부터 이주를 시작했고 11세기까지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싸움을 하는 전사이면서 동시에 상업을 겸하는 상인의 역할도 수행했다. 서유럽에서는 바이킹의 약탈을 기록만 사료가 비교적 많지만, 동유럽에서는 상업활동에 대한 기록도 존재한다.
1) 서유럽으로의 이주
이들은 10세기까지도 극심하게 약탈을 범했다. 서유럽으로 이주한 바이킹은 덴마크의 데인족, 노르웨이의 노르만족이다. 데인족은 9세기 후반 스칸디나비아와 브리타이나 동부를 점령하였는데, 당시 그들의 법률과 관습을 이식하여 정주하였다. 이 지역을 Danealw(데린로)라 부른다. 이 지역은 지속하여 혼란을 겪다가 노르만족이 노르망디 공작령을 수립한 이후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안정되었다.
노르만족이 노르망디 공작령을 수립하게 되는 과정은 당시 한 성직자가 작성한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9세기부터 이들은 프랑스의 루앙을 파쇠하고 수도원에 불을 지르는 등 분탕질을 일삼았다. 이후 “롤로(Rollo)”라는 인물이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에 상륙했다. 롤로 또한 프랑스 땅에서 여러 지역을 포위하고 전투를 벌였는데, 루앙의 대주교인 프랑코는 롤로에게 세례를 주고 루앙의 영주권과 네우스트리아 공작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런데 이는 대주교가 아닌 왕의 권한으로, 종교계의 입장에서 쓰여 다소 왜곡된 부분이 존재한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이후 롤로와 그 후손들은 루앙 주변으로 지배 영역을 확장하였고, 해당 지역을 “노르드인의 땅”이라는 의미의 “노르망디”로 명명하였다.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의 도시 노르망디가 바로 이때 성립되었다.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도 바로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9세기 초 스웨덴과 덴마크를 다스렸던, 오늘날 바이킹 이미지의 원조격 인물인 라그나르 로드브룩(Ragnar Lodbrok)은 자신의 아들인 비요른을 비요른의 스승인 해스팅과 함께 추방시키며 해외의 나라를 탐험하고 정복하도록 하였다. 비요른의 별명은 Ironside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전장에서 불사신과 같이 강인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비요른은 서유럽 대륙을 돌아 이탈리아의 루나까지 다다랐고, 루나를 파괴한 이후에 로마를 점령하고자 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이들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이미 접한 후였고,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비요른은 다시 귀환하고자 배를 돌렸다. 비요른은 귀환하는 중 난파하여 영국 해안에 겨우 상륙하였다. 이후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비요른의 스승이었던 해스팅은 프랑스에 정착해 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에게 평화 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노르만족의 분탕질로 고충을 겪었던 샤를은 해스팅에게 사르트르를 공물로 주면서 사태를 해결했고, 이후 바이킹의 약탈이 줄어들면서 프랑스는 사회적으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북유럽에 정착했던 이들이 남하한 것에 여러 원인이 있는데, 우선 8세기 경부터 인구가 증가하면서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더불어 정치적으로는 당시 형성되고 있던 통합적인 정치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던 이들이(대표적으로 비요른의 경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2) 동유럽으로의 이주
다음 지도를 살펴보자
위의 지도는 9세기~10세기의 바이킹의 이주 경로를 나타낸 것이다.
노르웨이, 덴마크의 바이킹과는 달리 스웨덴 지역의 바이킹들은 동유럽으로 진출하였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이킹들은 주변의 토착민들과 접촉하고 혼합되면서 “루스족”을 형성하였다. 이 토착민 부족은 핀우그리어파 부족인데, 이 바이킹들을 “루스”로 부르고 있었다. 이후 이 루스인들이 통합하면서 839년 소규모 국가를 건설하였고 활발한 교역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사실 820년대부터 많은 수의 북유럽 바이킹들이 이 바닷길을 통해 루스인의 땅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이에 부담을 느낀 루스인의 칸(수장)은 이들을 남쪽으로 보내고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후 이들은 볼가강과 드네프르강을 타고 급격하게 남하하여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해당 지역의 토착민들은 이들을 “바랑고이족”으로 불렀다. 바랑고이족들은 키예프에 거점을 마련한 이후 주변 농촌에 거주하는 슬라브족들을 정복하면서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교역을 하면서도 주기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였고, 주변 지역을 초토화시키기도 했으나, 성벽을 허물지는 못했다. 바이킹은 상인으로서 노예를 주로 취급했는데, 주요 고객이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한편 모든 바이킹이 남하한 것은 아니었다. 북동쪽의 노브고르드에 남아 거점을 마련했던 바이킹들은 862년 오늘날 러시아의 노브고르드를 중심으로 류리크 왕조를 개창하였다.
그 이후에도 많은 바이킹들이 이 루스인들의 땅으로 남하하였는데, 곤란했던 루스인의 칸은 이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으로 남하한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변 지역을 초토화하였지만 성벽을 허물지는 못했다.
3. 서기 1000년 전후의 상황
서기 천년의 유럽은 큰 변동을 겪고 있었다. 우선 962년에 신성로마제국(오토제국)이 수립되었고, 987년에는 서프랑크 왕국에서 카페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1066년 잉글랜드에서는 노르만족의 앵글로노르만 왕조가 개창되었다. 무엇보다 912년부터 1000년 전후로 동유럽인과 북유럽인 등 노르만족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길었던 제2차 민족이동이 종식되면서 유럽 대륙은 평화를 되찾았다.
9세기 중엽부터 1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사들에 의해 이 슬라브인들은 그리그 정교회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외부적인 침략에 의한 혼란의 종식이었을 뿐,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투쟁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서기 1000년 경의 유럽은 내부적으로 폭력이 만연한 사회였다. 이민족들과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는 기독교인들 간의 싸움이 전유럽적으로 광범위하게 펼쳐졌다. 특히 10세기 이후 권력이 영주들에게 쪼개지면서 이들은 비전투원(여성, 성직자 등)을 임의적으로 약탈하였다.
이런 현상을 타파하고자 교회를 중심으로 개혁 운동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신의 평화(Pax Dei)” 운동이라 한다.
4. “신의 평화” 운동
신의 평화 운동은 989년 샤루 공의회에서 시작되었다.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교회 관계자들은 전투원(이들은 아직 기사가 아니다. 기사는 11세기에 등장하였고 이때는 기사가 아닌 일종의 “기병”에 가까웠다.)들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여성, 성직자와 같은 비전투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런 금지조항을 위반할 경우에는 교회 차원에서 파문하는 것으로 제재하였다. 이 신의 평화 운동은 10세기 말 프랑크 남부에서 시작해 11세기에는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신의 평화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평화”를 기독교의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면서 폭력 사회를 종식시키고자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평화의 키스”이다. 평화의 키스는 전투원들이 서로 마주쳤을 때 입을 맞추는 것으로 서로에게 적대적이지 않음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신의 휴전” 운동도 함께 전개되었는데, 이는 특정한 날에 전투를 금지하는 것이다. 토요일까지는 전투를 수행하다 일요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휴전하는 식이다. 이렇게 기존에 없었던 규칙을 교회가 하나씩 제정하면서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당시 사회적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전투원뿐이 아니었다. 9세기 중엽 카롤링거 왕조가 무너지면서 수도원도 문화적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이때 전체적인 수도원의 수준이 낮아지면서 교회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세속 귀족들이 서임권을 남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서 몇 개의 수도원은 카롤링거 시대부터 이어진 학문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이후 문화적 부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수도원들 중 하나가 바로 910년에 건설된 “클뤼니 수도원”이다. 이 클뤼니 수도원은 11세기부터 신의 평화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떠올랐으며, 이후 대대적인 교회 개혁을 주도하면서 여러 개혁파 교황을 배출하였다.
다만 이 신의 평화 운동은 반영주제적, 반봉건적 운동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운동 자체가 교회와 영주가 결탁되어 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의 권력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유력자가 필요했고, 큰 영토를 다스리던 아키텐 공작을 중심으로 여러 공작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교회에서 주도한 운동에는 다소 한계가 있었고 신의 평화 운동이 유럽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큰 효과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를 이어 세속 귀족들이 이 평화운동의 주도권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들은 폭력을 금지하기보다는 폭력을 조절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이를 배출시키고자 했다.
몇몇 수도사들은 스페인까지 넘어가 신의 평화 운동을 전파하려 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북부에 기독교 세력, 남부에 이슬람 세력(알 안달루스로 불림)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슬람의 세력 범위가 훨씬 크고 강했다. 이때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개혁을 부르짖었다. 이를 “재정복운동”, 즉 “레콩키스타”라 하는데, 11세기부터는 성전(성스러운 전쟁)의 개념이 결부되기 시작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는 대혼란시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신의 평화 운동의 확장은 레콩키스타에 그치지 않았고 11세기 말 이후 십자군 전쟁으로도 이어진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중세의 기사와 기사도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Elisabeth Van Houts, The Normans in Europe (Manchester Medieval Sources),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