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봉건사 시리즈 / 6. 중세 기사와 기사도

신의 평화 운동이 전개되면서 우리가 흔히 “중세의 기사”라고 부를 수 있는 계급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12세기에 이르러 문명화된 기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번 포스팅을 통해 이들이 어떻게 등장했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또 사회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볼 것이다.

 

1. 중세 기사 계층의 등장 배경

3위계 이데올로기
3위계 이데올로기

당시 유럽 사회에는 3위계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 성직자 계급인 오라토레스(기도하는 자), 기사 계급인 벨라트레스(싸우는 자), 그리고 농노 계급인 라보라토레스(일하는 자)로 계급이 나뉘어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3위계 이데올로기다. 이는 11세기 중엽부터 교회가 주장한 이데올로기이다. 하지만 당시 사회 계층이 이렇게 3개로 나뉜 것은 아니었다. 상인과 수공업자 등 이에 속하지 않는 계급도 존재했는데, 교회는 사회가 변화하는 속도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 사회계층의 이념을 주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사 계층이 등장한 것은 신의 평화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간혹 기사와 귀족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둘은 동의어가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11세기까지는 다른 집단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한 집단으로 수렴하게 된 것이다. 당시 귀족은 프랑크 왕국 시대부터 내려오던 엘리트 계층과 그들의 후손이었지만, 무력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 성공한 이들은 자발적으로 귀족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각종 제련 기술과 야금술이 발전하면서 전쟁이 점점 기병과 전투원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에 대부분의 자유민들이 참여하던 전쟁을 소수의 전투원들이 주도하게 되면서 전투의 전문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들은 서기 1000년경에 처음 사료에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11세기까지는 “기병”에 가까웠고, 이들이 기사의 기원이 된 것이다. 초창기의 기사들은 귀족계층에 “봉사”하는 예속민 신분이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양을 쌓으면서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었다.

한편 귀족의 행정 등 업무를 대신하면서 봉사하던 미니스트리알레스(Ministriales)는 대부분이 예속민 출신이었다. 하지만 점차 예속성을 벗으며 귀족과 농노의 중간 계층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기사 신분으로 상승하였다. 당시 중세 귀족의 영지는 하나로 모여 있지 않고 여러 곳에 떨어져 있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기에 영주가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이에 영주는 대리인으로 미니스트리알레스를 보내 징세를 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영주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농민과 차별화된 신분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따.

이들은 독일에서는 중세 말까지 행정적, 군사적 기능을 세습하면서 독자적인 계층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기사와 미니스트리알레스 모두 지위를 세습할 수 있었다.

 

2. 중세의 성채

기사 계급의 등장과 성채는 서로 관련이 깊다. 서기 1000년 경 기사 계급이 등장하면서 도처에서 성채가 함께 등장하기 시작했다. 민족이동과도 관련이 깊은데, 이민족들이 침략해 들어오자 전투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모여 방어 진지를 구축하게 되었고 민족 이동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면서 지역을 장악하고 성채를 쌓았던 것이다.

11세기의 성은 대개 소규모의 목조 성채였는데, 12세기에 이르러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석조 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 성채는 요새와 저택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는데, 모순적이게도 농민들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수탈하는 봉건적 지배의 상징이자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성체가 요새 역할을 하면서 당시 전쟁의 양태는 1%의 전투와 99%의 공성전, 즉 성을 함락시키는 전투로 이루어졌다. 초창기에는 대포 등의 성능이 좋지 않았으나, 14세기에 이르러 화약과 대포가 발달하면서 성의 약점이 드러나게 된다. 중세 말에 이르러서는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거주용 성이 축조되었다.

 

3. 기사의 귀족화

앞서 이야기했듯이 11세기의 기사는 귀족보다는 농민에 더 가까웠다. 12세기부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면서 기사가 엘리트층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였고, 귀족과 기사의 사회적 지위가 가까워졌다.

당시 기병은 카발리(Cavalry)로 불리었고, 중무장 기병은 슈발리(Chivalry)로 불리었는데, 12세기 이전에는 카발리와 슈발리 모두 “기병”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다만 슈발리는 기병이면서 “전사적인 속성”을 가진 이들을 일컫는 단어였다. 하지만 13세기가 되면서 슈발리는 규범 코드를 가지고 교양을 가진 계층으로 분리되는 동시에 귀족과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슈발리는 일반 기병인 카발리와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13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집단으로 융합되면서 단일집단화되었다. 따라서 귀족의 자제가 성인이 되면 기사 서임식을 하도록 했다. 이 기시에 제작된 묘석 조각을 보면 귀족이 기사의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4세기에는 ‘기사’와 ‘귀족’이 아예 동일한 용어로 사용되었고, 15세기에 이르러 기사가 군사적으로 퇴락하였다. 당시 기사는 기사도의 이상적인 모습으로만 남아있었으며, 이때 토너먼드와 마상 시합, 기사도 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기사 서임식”을 받아야 했다. 이는 무기를 수여 받는 의식인데, 앞서 언급했듯이 13세기부터 귀족의 자제들이 성인이 될 때 기사 서임식을 받기 시작하면서 귀족 신분의 지표로 인식되었다.

이에 당시 12세기 당시 ‘기사’는 “주군을 섬기는 전사”, “성인이 된 귀족” 이렇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귀족의 자제 중에서 무장할 돈이 부족하거나 막내인 경우에는 기사 서임식을 받지 못하고,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기사를 보조하는 기사의 종자가 되기도 했다. 11세기부터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권력의 중앙집권화가 일어나면서 기사 계층에서도 적체가 일어났다. 이에 나이가 40세가 넘도록 기사가 되지 못하는 종자들도 적지 않았다. 12세기부터 이들은 십자군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스스로 해외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13세기에 이르러 십자군도 정체되기 시작하자 귀족 자제들 사이에선 자산가 여성과의 결혼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4. 마상시합

마상시합은 토너먼트로도 불리는데, 11세기 말에 등장한 모의 전투이다. 처음에는 대규모 집단의 전투 형태를 띠었다.

마상시합의 목적은 살상보다는 생포하여 전리품과 몸값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직자들은 이 마상시합이 실전과 다르지 않다며 비판하였는데, 따라서 11세기 이후 교회의 관심은 이 폭력 집단에게 교양을 함양시키는 것이었고, 마상시합에 관해서도 교회 차원에서 관리하고자 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오락적 형태로 변화하였다.

 

5. 기사도

마네세 법전
마네세 법전

기사도(Chivalry)는 기사들의 이상적 행동 규범, 혹은 ‘기사들과 귀족들이 가능하면 따르려 했던 행동양식’을 의미한다. 12세기 토착어 문학작품에서 등장하여 발전한 용어인데, 명예와 충성의 규범을 추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문학작품에서의 기사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기사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현실과의 괴리가 컸다. 이후 이 기사도는 ‘궁정예술’와 서로 일치하는 개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궁정예술로서 기사도가 등장한 이유는 기사들을 기독교화 하기 위한 사제들의 노력과 관련이 있다. 12세기 초에 등장한 “궁정예술”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교회가 기사들을 순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었다. 다만 기사들도 다른 계층과의 차별화라는 개념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12세기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귀족들의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고, 특히 귀족 부인들이 기사도 문학을 쓰는 시인들을 후원하면서 기사도 문학의 수준이 더욱 향상되었다.

중세 후기에는 기사도 문학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이는 기사 계급의 쇠퇴와 관련이 있다. 당시 개인 화기가 보급되면서 기사들이 군사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들은 군사적인 기능보다 사회적인 기능을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중세의 기사도 문학은 주로 용기, 충성, 완력, 전쟁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았다. 우아한 궁정 예절을 요구하면서 여성에 대한 보호와 정중한 태도를 강조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궁정식 사랑”이다.

궁정식 사랑은 기사도 문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당시 난폭한 미혼의 기사 집단들이 영주를 따라다녔는데, 통제 불가한 이들의 행동을 절제시키기 위해 성주의 부인을 레이디로서 모시는 것이 궁정식 사랑의 기본 개념이다. 궁정식 사랑은 철저한 플라토닉적인 사랑이었으나, 종종 불륜적인 요소를 포함하기도 했다. 하지만 핵심은 연인에 대한 종교적 헌신이었기에 교회도 이런 문학의 영역에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궁정식 사랑에서 성주의 부인은 어머니인 동시에 상직적인 여성이었다.

궁정식 사랑에서 여성은 사랑의 조건을 정하고 남성이 이에 굴복하는 형태이지만, 이는 현실과 괴리가 큰 것이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실제 귀족 계급의 결혼은 정략으로 이루어졌고 여성은 남편의 권위 아래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궁정식 사랑은 기존의 결혼제도에 대한, 부분적으로는 사회질서 전반에 대한 저항을 담았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영주 계층이 자기들의 사회 제도를 유지하고 폭력을 단속하기 위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궁정식 사랑 이데올로기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간 사례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궁정식 사랑은 귀족계층만의 문학적 유희에 불과했고,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다.

 

6. 중세의 귀족과 결혼 제도

앞서 언급했듯이 12~13세기에 귀족은 별개의 두 집단의 융합으로 형성되었다. 하나는 프랑크 왕국의 대귀족인 백작과 공작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주에게 봉사하는 전사 계층(Milites)이었다. 특히 전사들은 십자군 시기에 크게 성장하면서 “기사 계급”이라는 카스트를 형성하였다.

귀족들의 결혼은 정략결혼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정치적, 경제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혼인은 지배계층을 재생산하고, 지배 계층의 응집과 결속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여성은 일종의 거래되는 물건으로서, 볼모 혹은 정치적 도구로 취급되었다. 다시 말해 결혼에서는는 당사자들의 뜻보다는 가족 간의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게 다뤄졌다.

재산은 혼사의 핵심 문제 중 하나로, 가임기가 지난 여성이어도 재산이 많은 경우 혼인이 이루어졌다.

초기의 결혼 모델은 가문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세속적 결혼이었다. 하지만 12세기에는 기독교적인 결혼 제도가 점차 확립되었다. 교회가 결혼 제도를 장악하면서 교회는 결혼에서의 영적인 차원을 강조했다. 따라서 같은 신앙을 가진 결혼만을 의무적으로 규정하였다.

1215년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교회는 결혼을 “성사(성스러운 일)”로 선포하였다. 기독교적 결혼 제도 하에서는 세속적 결혼 보다 혼인 당사자의 동의가 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졌다.

11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결혼 제도에의 개입을 시도하였다. 본래 프랑크족의 일부다처제를 야만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일부일처제 모델을 확립하였으며, 근친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을 금지하였다. 세속적 결혼 모델이 기독교화되면서 성직자들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성직자들이 신도들의 삶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12세기부터 강해졌고 13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십자군 전쟁에 관해 다룰 것이다.

서양 봉건사 시리즈 / 7. 십자군전쟁

 

+ 중세 군대의 특징

1. 간헐적 소집
귀족의 영지가 각각 떨어져 있었기에 군대를 소집해도 간헐적으로 따로 모이게 되었다.

2. 자력 무장
각자의 토지에서 귀족들을 따라다니는 기병들이 자력으로 무장하였다.

3. 중무장 발전
“십자군 전쟁 전까지 전투는 없었다.”
대부분 난전이나 혼전의 소규모 접전만이 존재했다. 따라서 어디서 칼이나 철퇴가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중무장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보병 부대와 군사작전이 발전하지 못했다.

3. 십자군 시대의 변화
대형 기마 충격전이 형성되면서 기사수도회가 질서정연한 대형을 갖춘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주요 질문

1. 기사 계급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 기사의 귀족화 과정

2. 중세 기사도의 특징은 무엇이며 그 사회적, 문화적 의미는 무엇인가?

 

참고문헌

콘스탄스 브리텐 부셔 지음, 강일휴 옮김, 『중세 프랑스의 귀족과 기사도』 (신서원, 2005년).

필립 아리에스, 조르주 뒤비 편집, 『사생활의 역사, 2.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 (새물결, 2006), pp.148~241.

유희수, 『사제와 광대: 중세 교회와 민중문화』 (문학과 지성사, 2009), pp.161~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