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전쟁은 중세의 봉건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사건으로서, 교회개혁과 함께 11세기 서유럽의 주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십자군 전쟁의 배경과 전개, 결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십자군
7세기 경 기독교의 최대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이 점령하였다. 본래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의 영토였는데, 비잔티움 제국이 이를 계승한 후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하면서 빼앗겼다. 이후 예루살렘을 다시 되찾았으나, 638년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슬람에게 점령당한 후에도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순례를 갈 수 있었다.
오히려 이슬람인들이 순례를 오는 기독교인들을 반기기도 했는데, 이들에게 금전적 이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성지의 돌을 쪼개서 성물로 팔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11세기 셀주크 튀르크에서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를 금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슬람의 순례 금지 조치에 11세기부터 유럽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유럽인들은 매우 호전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성지를 탈환하자는 기지를 내걸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이동하였는데, 하나는 육로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을 거치는 경로, 하나는 해상 경로였다. 십자군 전쟁 당시 베네치아와 제노바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십자군의 이동에 크게 기여하면서 12~13세기 이 도시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이 도시들은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였고 베네치아는 13세기부터 전성기를 누렸다.
이베리아 반도를 향한 십자군도 존재했다. 저번 포스팅에서 언급한 재정복전쟁, 레콩키스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편 11세기 중엽 로베르 기스카르를 중심으로 노르만족이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에 정착하였다. 기스카르는 교황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 받아 시칠리아를 지배했다. 후에 기스카르는 공작 자위를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었는데,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첫째 아들 “보에몽(Bohémond)”은 후에 1차 십자군 원정을 이끄는 주요 지도자가 된다.
2. 십자군 원정의 배경

지금까지의 포스팅에서도 다룬 내용이지만, 카롤링거 제국이 쇠퇴하고 2차 민족이동이 일어날 당시의 유럽 대륙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1000년 경 사회가 안정되면서 도시가 발전하고 상인들이 도시에 모여 거주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였고, 더불어 인구가 증가하면서 도시와 상업이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1세기 성직자를 비롯한 교회의 부정부패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자 저번 포스팅에서 언급한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그레고리우스 7세를 시작으로 성직 매매를 반대하는 개혁 교황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1세기 말 취임한 클뤼니 개혁파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을 주장하면서 신의 평화 운동을 외쳤다.
한편 기사 계급이 발전하고 기사 제도와 문화가 발전하면서 기독교 자체적으로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성직자들이 칼을 차고 다녔을 정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십자군전쟁 발발의 원인은 앞서 언급한 셀주크 튀르크의 순례 금지 조치이다.
3. 동상이몽
9세기부터 장원이 발전하였고, 11세기에는 기사 계급이 발전하면서 봉건 사회가 형성되었다. 더불어 봉건 영주층이 성장하면서 십자군의 주력은 기사와 봉건 영주였다.
그런데 이들 봉건계층은 모두 저마다의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일부는 십자가를 지니고 성전에 참여함으로써 죄를 씻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십자군에 참여했다. 반면 장남이 재산을 모두 받는 지역의 경우에는 차남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십자군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지역이 땅을 점령해서 영주가 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다시 복귀하였고 병력도 주기적으로 교체되었다.
교황에게도 종교적,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우선 교황은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고자 십자군을 적극적으로 주창한 측면이 있다. 또한 이 십자군은 폭력적이었던 봉건 계급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독교 세계를 재통합하고, 교회를 위한 군사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 또한 존재했다. 교황은 이와 더불어 교황권을 강화하여 교황군주게를 실현하고자 했다.
실제로 학계에선 십자군을 통해 교황의 지도력이 확인되었고, 12~13세기에 일종의 교황군주제가 실현되었다고 평가한다. 13세기에 교황권이 절정을 이루었으나, 십자군이 끝나면서 교황권도 함께 추락하였다.
이탈리아 도시들 또한 이슬람 해적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교역로 확보를 염원했다. 그런데 지중해를 이탈리아 도시들과 십자군 세력이 장악하면서 지중해가 기독교 세력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교역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이탈리아 도시들이 크게 성장한 것이다.
4. 원정의 시작

11세기 말 셀주크 튀르크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로마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원조를 요청하였고 1095년 클레르몽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다.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신의 평화”를 선포하면서 제1차 십자군을 결의하였다. 교황은 호전적인 기사들에게 기독교인들 간의 평화를 준수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그들을 동쪽의 이교도들과의 전투를 하도록 독려했다.
이렇게 교황이 직접 십자군을 선포하면서 신의 평화 운동은 “성전” 및 “정당한 전쟁”으로 변화하였다. “모든 성전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라는 원칙하에, 십자군 전쟁은 비합법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무력에 맞선 성스러운 전쟁으로 정당화되었다.
제1차 십자군은 클레르몽 공의회 4년 만인 1099년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팔레스타인에 4개의 라틴 국가를 건설하였는데, 이때 이 지역에 서유럽의 봉건제가 그대로 이식되었고 영주와 기사의 주종 관계가 생겨났다.
십자군은 서유럽에서 사용하던 전투 기술을 성지에서 재적용하면서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공성전에서 끈기 있고 조직화된 모습을 보였고 기사수도회도 함께 활약하면서 시너지를 발휘하였다.
이들은 이슬람의 전투 기술을 도입하여 경기병이나 기마궁수를 배치하였는데, 이때 시리아의 후손이면서 십자군 군대에서 싸우는 투르코폴(Turcopole)이 등장하였다. 이슬람이 완전히 통일된 세계가 아니었고 금전적 이득을 제공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돈을 주고 아르메니아인이나 레바논의 마론파 교도 등 용병을 대규모로 고용하여 보병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5. 기사수도회
기사수도회는 십자군 원정 당시 성지를 수호하고,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속된 기사 단체이다. 이들은 수도사인 동시에 기사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십자군에 일종의 “정규군”을 제공하였다.
기사수도회는 실제로 십자군 원정에서 크게 활약하였는데, 규율이 잘 잡혀있던 정규군은 기마 충격 전술을 활용하여 십자군의 전투에 기여하였다.
기사수도회의 종류도 여러 가지인데 대표적으로는 시기 순으로 구호기사단(병원기사단), 성전기사단, 튜튼기사단이 등장했다. 구호 기사단은 전투를 수행하면서도 부상자들을 돌보는 데에 힘을 썼다. 성전 기사단은 예루살렘 성지를 지켰는데, 전투를 하지는 않았고 상업 활동도 활발하게 수행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튜튼 기사단은 독일 기사단으로 귀국한 후에 중부/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6. 십자군전쟁의 결과
하지만 십자군은 성지 회복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슬람의 전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십자군끼리의 분열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프랑스 왕도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후 서로 갈등하였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수복하지 못했다.
십자군전쟁은 유럽 사회에 크고 작은 변화를 불러왔다. 수많은 봉건 영주가 토지를 처분하고 십자군에 참여하면서 장원이 해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신심이 충만한 일부 영주들은 가족들에게조차 참전을 밝히지 않고 재산을 처분하여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종교적 열정이 식고 교황권이 타격을 입으면서 동시에 군주권이 강화하고 봉건 계급이 약화하였다. 프랑스는 12세기 말부터 왕권이 크게 강화하는데, 이는 십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동방문화와의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수많은 동방의 지적 자산들이 기독교 세계로 유입되었다. 이는 성지에서의 접촉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레콩키스타가 더 크게 기여했다. 스페인의 문화 중심지였던 톨레도의 책들이 유입되었고, 톨레도에 살던 유대인들이 텍스트를 번역하였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재발견되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중세 교회와 서임권 투쟁에 관해 다루도록 하겠다.
주요 질문
1. 십자군 전쟁의 원인과 동기는 무엇인가?
2. 십자군이 서유럽 세계의 변화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참고문헌
토머스 F. 매든,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루비박스, 2005).
안상준, 「중세 유럽의 교황군주제와 십자군」, 『서양사론』, 제101호 (2009), 5-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