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봉건사 시리즈 / 9. 봉건제와 봉건사회

이번 포스팅을 통해 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봉건사회를 다뤄보고자 한다.

봉건제의 개념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봉건사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는지 살펴볼 것이며, 봉건제와 장원제의 차이점을 비교하고, 봉건사회의 시대 구분과 각 시기의 주요 특징을 알아볼 것이다.

 

1. 중세 서유럽 봉건 시대의 특징

9~10세기 봉건제가 발생하던 시대의 서유럽에서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첫 번째는 보편성의 추구, 두 번째는 지방분권 현상이다.

당시 서유럽인들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으로 보편성을 추구했는데, 이는 제국과 교황이라는 두 단위로 분리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두 보편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두 세력이 부딪힌 사건이 바로 이전 포스팅에서 다뤘던 서임권 투쟁이다.

반면 보편성과는 대조되는 현상으로 지방분권 현상이 나타났다. 정치가 분화하면서 동시에 각 지역의 특색이 확실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각 지역마다 고유의 화폐나 관습법이 생겼고, 도량형 또한 상이했다. 특히 화폐 단위가 독자적이었던 것은 중앙권력의 국왕이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 아닌, 각 지역의 영주들이 각자의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금속의 함유량이나 중량이 모두 달라 당시 사람들은 다른 지역과의 유통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는데, 11세기 이후로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환전상이 등장하였다. 환전상은 금속의 구성요소나 무게 등을 따져 다른 화폐 단위를 같은 가치로 변환해서 환전해주는 역할을 수행했고 당시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직업군이었다.

특히 서프랑크 남서부의 아키텐이나 프로방스, 이탈리아 중부 등에서 매우 강력한 정치적 분권화 현상이 나타났는데, 지난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성채를 중심으로 지방의 영주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교회개혁 이전까지는 지방 영주들이 교회와 수도권을 장악하였고 교회도 봉건제의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방 영주들은 교회와 수도원을 사유재산처럼 취급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10세기 후반부터 클뤼니 수도원에서 개혁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2. 봉건제와 봉건사회

봉건제(Feudalism)라는 단어 자체는 17세기 이후에 등장한 용어로 중세에는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다. 이는 계몽주의 법률가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 절대왕정기의 법률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들에 “봉건제”라는 이름을 붙여 중세와 구체제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이후 19세기 고문서 학자들이 봉건제를 중립적인 용어로 재수용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흔히 “봉건제”와 “봉건사회”를 혼용하는데, 엄밀하게 이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봉건제”는 법률적 개념의 용어로, 계약으로 관장되는 재산인 봉토의 소유 및 전수에 관한 개념이다. 계약을 통해 주군과 가신이 봉토를 주고 받는 관계를 맺게 되고, 영주가 독립적인 세력이 되면 왕에게 받던 봉토를 사유재산화하여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카롤링거 시대 초기에는 왕이 나누어 준 봉토를 회수했으나, 카롤링거 왕권이 약화하면서 영주들이 봉토를 사유재산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큰 권력을 가진 공작들은 자신의 거대한 봉토를 쪼개 하위 귀족에게 다시 나누어주면서 주종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반면 “봉건사회”는 이 봉토를 가신들이 후손들에게 물려주면서 형성된 파편화, 지방화된 사회를 일컫는다.

 

3. 영주제

영주제는 대토지를 기반으로 부와 권력을 소유한 영주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영주의 이러한 지배는 8~9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과거 프랑스 학계에서는 영주제의 등장을 10세기 혹은 11세기로 보았으나, 오늘날에는 영주들이 서기 천 년 경에 갑자기 공권력을 사유화한 세력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현상이 장기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났다는 것이다.

대영지를 기반으로 한 영주제는 특히 카롤링거 시대에 루아르강과 라인강 사이의 서부 독일 및 이탈리아 북부에서 나타났다. 이로써 봉건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

 

4. 장원제와 봉건제

장원에서 부역을 하는 농노
장원에서 부역을 하는 농노

장원(Manor)은 중세 농촌 사회의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기본 단위로, 농노에 대한 영주의 수탈와 지배 장치 중 하나이다.

장원제는 이 장원 내에서 농노에 의해 농경지가 경작되는 경작 체계를 의미한다. 이 장원제는 봉건제보다 앞서 일어났는데, 봉건제의 종말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장원제는 크게 두 가지 시기로 나누어지는데, 9~11세기의 고전 장원의 시대에는 농노들이 일, 즉 부역을 했으며, 12~13세기의 순수 장원의 시대에 이르러 농노들은 현물(생산물) 또는 화폐를 통해 영주에게 지대를 납부하였다.

장원제(manorialism)와 봉건제는 종종 혼동되지만, 두 제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장원제는 농노에 의해 경작되는 농경지의 경작 체계를 의미하며, 주로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반면 봉건제는 정치적 측면에서 권력이 분권화된 정치 체계를 의미한다. 중앙 권력이 해체되고 지방분권적 사회가 형성되면서 봉건제가 등장하였다. 봉건제는 주군과 봉신 간의 계약을 통해 형성된 주종제도를 바탕으로 하며, 이는 정치적, 법률적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따라서 봉건제는 정치적 측면에서의 권력 구조를, 장원제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농업 경작 체계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5. 봉건제에 대한 해석

봉건제는 시대별로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우선 19세기의 전통적 해석은 정치사적, 법제사적,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봉건제를 이해하려 했다.

정치사적 관점에서는 봉건제를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체제가 몰락하거나 약화될 때 나타나는 통치 조직으로 보았다. 한편 법제사적 관점에서는 봉토 수수 관계를 기반으로 한 주종제를 봉건제의 본질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는 봉건제를 농노제에 입각한 장원제(봉건적 토지 소유)로서, 영주들의 봉건적 토지 소유와 지배 수탈 관계로 이해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역사인류학적 관점에서 봉건제를 보다 종합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마크 블로크(Marc Bloch)는 봉건제를 하나의 사회 유형(social type)으로 파악하고, 영주과 가신 사이의 주종관계 그 자체를 봉건제의 본질로 이해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종제도, 농민층의 종속, 봉토제도, 전사 계급과 가신제, 권력의 분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르주 두비(Georges Duby)는 봉건제의 근본적인 측면으로 정치적인 측면과(주권의 해체) 영토적인 측면(토지에 기반한 사회 종속의 망)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 토지를 바탕으로 하여 사회 전체의 구성원들이 주종관계 혹인 지배관계로 그물망처럼 엮여 있었다는 것이다.

6. 봉(封, fief)

“봉”은 하급 영주가 상급자에 대한 군사적, 행정적 봉사의 대가로 받는 토지나 지대를 의미하며, 중세 라틴어의 Feodum, 혹은 feudum에서 유래하였다.

“봉건적”이라는 말은 “봉토에 관련된”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봉”은 점차 세습 재산으로 인식되는 토지나 지대와 동일어가 되었다.

“봉건제”를 뜻하는 “Feudalism”은 근본적으로 법률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즉, 계약으로 관장되는 재산인 봉(토)의 소유 및 전수에 관한 개념인 것이다. 봉토는 영주들 간의 병합이나 분할의 대상이었다.

봉토는 8세기의 은대지(恩貸地, beneficium) 제도에서 기원하였다. 은대지는 가신의 군사적 봉사에 대한 대가로 양도된 토지를 의미한다. 9세기부터는 은대지를 뜻하는 beneficium 대신 feodum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카롤링거 시대의 정복 전쟁이 중단되면서 은대지 배분이 중단되었는데, 이에 왕에 의해 대여된 토지가 점차 세습적인 자유보유지로 변화하였으며, 이는 카롤링거 왕조가 약화된 데 영향을 미친 사회경제적 현상이다.

 

7. 봉건제의 형성과 특징

봉건제는 국가권력의 부재(9세기 중반 이후 왕권이 약화)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등장하여 10세기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국가 공권력이 해체되고 지방분권화가 일어나면서 봉건적 주종제도에 기반한 사회관계가 등장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불수불입권이다(Immunity, 不輸不入權).

불수불입권은 본래 로마 시대에 면세권을 일컫는 단어였다. 그런데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행정, 사법을 포함한 광범위한 자치적인 통치권을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다.

봉건제와 봉건사회는 국가 출현의 틀을 마련하였으며, 10~13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는 봉건 왕정 국가인 잉글랜드, 프랑스, 카스티야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8. 봉건적 주종제도

봉건적 주종 제도
봉건적 주종 제도

봉건적 주종제도(vassalage)는 봉건사회의 핵심 구조로, 주군(lord)과 봉신(vassal) 간의 인격적 종속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주종제도는 신종선서(homage)와 충성서약을 통해 형성되며, 주군은 봉신에게 토지를 수여하고, 봉신은 군사적 봉사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쌍무적 계약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계약 위반 시 주군이 토지를 회수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그러나 주군의 힘이 약할 경우, 봉신의 토지를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봉건적 주종제도는 자유인들 사이의 계약 관계로 이루어졌기에, 농노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봉신들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나, 완전히 예속된 상태는 아니었다. 주군은 여러 봉신을 가질 수 있었으며, 봉신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주군을 리즈(liege)라고 부르고, 리즈와의 신종선서를 “지상의 선서(liege homage)”라고 하였다. 만약 여러 주군에서 동시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봉신은 리즈를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했다.

왕의 경우에도 다른 왕의 영토에 봉토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그 왕에게 신종 선서를 해야 했다. 백년전쟁 직전 영국과 프랑크의 관계가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조상 때부터 내려 온 프랑스 땅의 봉토에 대해 프랑스 왕에게 신종선서를 해야 했고, 프랑스는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9. 봉건사회의 시대 구분

봉건사회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9~11세기)는 인구 감소와 낮은 인구 밀도, 교역의 위축과 화폐의 기근, 정치적 분권화가 일어났던 시기이다. 당시는 철저하게 농촌 중심적인 시대였으며, 도시가 크게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봉토의 세습화가 진행되었으며, 각 지역에서 성채들이 등장하고, 백작령과 공작령의 시대가 열렸다. 또한, 기사 계층이 등장하면서 봉건사회의 구조가 더욱 복잡해졌다.

제2기(11~13세기)는 중세 시대의 가장 안정되었던 절정기로, 경제 혁명과 농업 혁명으로 인해 경제가 크게 발전하였으며,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인구가 증가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예술과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고딕 건축, 대학, 수도원이 번성하였다. 사회적인 변화로는 봉건사회의 재조직과 봉건 영주의 지배가 강화되었다.

특히 지방분권화가 심화되었는데, 10세기보다 11~12세기에 더 심하게 발생하였다. 다만 영국은 노르만족의 정복에 의해 빠르게 중앙집권화되면서 분권화가 심화되지 않았고, 반면 프랑스는 12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왕권이 강화되면서 지방분권화를 억제할 수 있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중세의 변경 지역 중 이베리아 반도에 관해 다룰 것이다.

서양 봉건사 시리즈 / 10. 중세의 변경 지역 (이베리아 반도)

 

주요 질문

1. 봉건제란 무엇인가?

2. 봉건 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