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이 많고 위엄 있는 공작과 자작(Viscount)
“The innocent sports of their inferiours in age and grandeur…”
“어리고 위엄 없는 이들의 순수한 스포츠…”
1712년 5월 25일 일요일, 말버러 공작(John Churchill, 1st Duke of Marlborough)과 그의 친구 타운센드 자작(Charles Townshend, 2nd Viscount Townshend)은 서리 주(Surrey County)의 펀힐(Fernhill)에서 한 크리켓 경기를 두고 내기를 한다. 다음 해에 있을 총선에서 토리당에 대한 지주(freeholder)들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그들의 자녀와 함께 크리켓 경기를 즐긴 것이다. 그런데 공작과 자작은 각자 2명의 아이를 파트너로 삼고 경기를 이기는 쪽이 20기니를 얻는 도박을 하기로 한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두 귀족은 큰 질타를 받게 된다. 이들이 사람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게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들의 행위는 크리켓이라는 스포츠에 대한 당시 영국인들의 인식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1712년 한 신문에서 이 사건에 대한 논평이 실린다. 존 바커(John Barker)가 작성한 이 논평의 제목은 “안식일을 깨는 아주 대단하신(Princely) 방법”인데, 두 귀족의 행태를 반어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비꼬았다. 서두에 언급한 영어 구절은 크리켓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을 표현한 것으로 “나이 많고, 위엄 있는” 귀족들이 “어리고, 위엄 없는” 아이들이 즐기는 스포츠에 개입함으로써 순수한 스포츠를 타락시키는 것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리켓이 만들어진 유래를 먼저 알아야 한다. 크리켓은 중세 잉글랜드 남동부에서 어린이들이 즐기던 스포츠에서 유래했다. 크리켓이 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97년으로, 길드포드 법원에서 검사관이 했던 증언에서 언급되었다.
“Being a scholler in the ffree schoole of Guldeford(Gildford), hee and diverse of his fellows did runne and play there at ‘creckett’ and other plaies.”
“길드포드 자유 학교의 학생과 다양한 그의 친구들은 ‘크리켓’과 여러 놀이를 즐겼습니다.”
증언 당시 검사관의 나이는 59세로, 증언 속 사건 당시의 시점을 감안하면 검사관이 학생이던 시절 크리켓을 즐겼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1611년 렌들 코트그레이브의 사전(Randle Cotgrave’s Dictionary)에서 명사 ‘crosse’를 “아이들이 크리켓을 할 때 사용하는 구부러진 지팡이”로, 동사 ‘crosser’를 “크리켓을 치는 것”으로 정의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크리켓을 본래 어린이들이 즐겼던 스포츠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성인이 크리켓 경기를 즐겼다는 기록이 등장하나, 당시 영국 내에서 크리켓은 나이 많고 권위 있는 귀족들이 즐기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2. 청교도와 안식일, 그리고 크리켓
“As the devil never is watching in his own cause, so he had taken all imaginable care to second the Duke’s inclinations; for, as the devil would have it, the Duke and Lord found several Boys ready to their Hands playing at Cricket.”
“악마들이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못 하는 것처럼, 공작은 가능한 모든 신경을 동원하여 자신의 뜻을 재청(再請)하고자 하였다. 악마가 원했던 것처럼, 공작과 자작이 크리켓 경기를 할 준비가 된 몇 명의 소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비판을 받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귀족이 크리켓을 즐긴’ 것보다 ‘안식일에 도박을 자행’한 것이다. 바커가 이 논평을 쓴 것은 두 귀족이 안식일에 도박을 한 것을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안식일을 깬 두 귀족들이 마치 악마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바커가 이들을 악마에 비유한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선 안식일이 당시의 영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왜 일요일이 안식일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청교도의 ‘안식일엄수주의’
17세기 영국의 안식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시 영국의 청교도를 이해해야 한다. 다른 개신교도들과 구분되는 청교도의 고유한 특징은 ‘안식일엄수주의’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청교도의 안식일엄수주의는 “안식일 교리의 절정”으로, 교회가 일요일인 주일을 준수하는 데 안식일 계명이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개입의 핵심은 안식일과 주일이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완전히 동일시된다는 점이다. 하나씩 살펴보자면, 우선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의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래 안식일은 ‘제 7일’인 토요일이지만, 청교도의 안식일엄수주의를 통해 일요일인 주일과 안식일이 동일시 된 것이다. 청교도인들이 제 7일이 아닌 일요일을 준수한 것은 “청도교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새 창조로 보았고, 그 사건에 근거하여 안식일의 요일을 바꾸고자 했기 때문”이다. 청교도는 교회의 자의적 결정이라는 비판을 피하고자 이를 신적 권위에 의한 결정이라 주장하였다. 안식일 계명이 이에 개입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자.
엘리자베스 1세 시대(1558~1603)의 영국인들은 주일 예배 이후의 시간을 각종 오락과 스포츠를 즐기며 나태하게 낭비하였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주일에 도박, 승마를 비롯한 각종 오락을 제한하려는 성직자들의 의견이 힘을 얻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이를 『성직자회의의 청교적 조항』(1563)으로 문서화하여 요구하였으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청교(도)’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성직자 회의의 청교적 조항』에 따른 요구는 거절됐으나, 이를 시작으로 청도교적 교리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던 저자들은 안식일엄수주의와 결을 같이 하는 수많은 저작을 만들어냈고, 이는 “청교도 안식일엄수주의의 교리적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한다.
니콜라스 바운드(Nicholas Bownd)는 이 기초 위에 안식일엄수주의를 온전하게 완성하였다. 그는 1595년 『안식일의 교리(Doctrine of the Sabbath)』를 출판하면서 최초로 청교도적 시각으로 안식일 계명을 포괄적으로 해석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저작을 통해 청교도의 안식일엄수주의는 매우 견고한 구조의 교리를 정립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청교도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시점이 안식일엄수주의의 절정이며, 그 이후로는 눈에 띄는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교도의 안식일 교리의 발전이 계속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청교도와 가톨릭교도를 견제하던 국왕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제임스 1세는 1617년, 스포츠 선언(Declaration of Sports)으로도 불리는 『스포츠의 책(Book of Sports)』를 공표하면서 주일에도 춤, 스포츠, 심지어 도박까지 포함하는 각종 오락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이에 더해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는 모든 성직자들에게 이를 낭독하도록 명령하였고, 이로 인해 주일에의 영국인들의 나태함은 이전보다 더욱 심각해진다.
청교도를 자극해온 두 국왕의 선언은 반작용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스포츠 선언의 부작용으로 인해 주일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졌다. 교회와 의회도 이러한 여론에 동조하게 되었고, 1625년부터 1657년에 걸쳐 노동, 스포츠를 비롯한 각종 오락 등을 금지하는 법들이 차례로 제정된다. 주일의 행동 강령이 엄격하게 자리 잡아가던 와중, ‘웨스트민스터 표준(Westminster Standards)’이 승인되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은 신학자와 상원의원, 하원의원으로 구성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제작한 문서로, 1643년부터 1649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웨스트민스터 표준은 창세기의 몇 개의 구절을 인용하여 안식일 계명을 강화하였다. 인용된 구절들은 모두 ‘안식일 제도가 하나님의 창조 중에 세워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주일이 안식일과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된 성문에서의 근거를 웨스트민스터 표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서 중
“he hath particularly appointed One day in Seven, for a Sabbath, (…) which, from the beginning of the world to the resurrection of Christ, was the Last day of the week; and, from the resurrection of Christ, was changed into the first day of the week.”
“하나님께서 일주일 중 하루를 특별히 안식일로 지정하셨는데, (…) 천지창조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마지막 날(토요일)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는 첫 날(일요일)이었다.
를 통해 웨스트민스터 표준이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시점을 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삼아 그 이후의 안식일은 주일인 일요일임을 ‘성문으로’ 천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서 중 이 내용을 담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이 1647년에 스코틀랜드, 1648년에 영국에서 채택되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근거한 안식일 규례가 자리를 잡았다. 결정적으로 1677년, 의회가 주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을 통과시키면서 영국의 안식일 제도는 공식적으로 매우 엄격한 청교도의 견해를 따르게 된다.
2) 청교도의 안식일과 크리켓
그렇게 당시 영국의 안식일 제도는 청교도의 견해를 따르게 되면서 매우 엄격해졌고, 17세기 영국인들에게 안식일을 깨는 행위는 매우 큰 도덕적 흠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인 일요일에 스포츠를 즐긴 것도 모자라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20기니를 걸고 도박을 한 말버러 공작과 타운센드 자작에 대한 비난은 당시로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안식일에 크리켓 경기를 즐겨 비난을 받은 건 두 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시 영국에는 ‘교회재판소’가 있었다. 교회재판소는 교회 내의 영적, 종교적 사건에 대한 재판을 관할하는 국가기관이었으며, 물론 안식일 위반하는 사건의 재판 관할권도 갖고 있었다. 17세기 영국의 안식일 위반 사례는 대부분 교회재판소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11년에 일어난 일명 시들쉠(Sidlesham) 사건이다. 시들쉠 교구의 주민인 바솔로뮤 와이엇(Bartholomew Wyatt)과 리처드 라터(Richard Latter)는 무려 부활절 주일에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크리켓을 즐겼다. 교회재판소는 이들에게 각 12펜스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했으며, 돌아오는 다음 일요일에 ‘보속(penance)’을 하도록 판결했다. 보속은 넓은 의미로는 손해를 배상하는 행위를 뜻하나, 기독교 사회 내에서는 고해성사를 한 이후 속죄하기 위한 행위를 의미한다. 바솔로뮤와 리처드는 그 다음 주 일요일, 시들쉠 교구 교회의 모든 신도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Whereas I have heretofore highly displeased Almighty God in prophaning his holy Sabbath by playing at Crickett thereby neglecting to come to Church to divine service (…)”
“저는 지금까지 크리켓을 즐기면서 교회에서 신성한 봉사를 하는 것을 소홀히 하여 거룩한 안식일을 신성을 더럽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매우 불쾌하게 하였습니다. (…)”
1682년, 서식스 주 이스트 라반트(East Lavant) 교구의 주민인 에드워드 테일러(Edward Taylor)와 윌리엄 그린트리(William Greentree) 또한 주일에 예배를 나가지 않고 크리켓 경기를 즐긴 혐의로 기소되었다. 테일러는 예배 시간이 아닌 예배 전후 시간에 크리켓을 즐겼다고 진술하면서 처벌을 면하려 했으나, 12펜스와 ‘보속’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의 친구 그린트리는 테일러가 자백하기 전까지 범죄를 부인하면서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교회재판소의 보속은 교구민들로부터 실효성 없는 처벌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스트 라반트 교구 내 크리켓 경기로 예배에 불참하는 범죄를 저지른 여덟 명의 남성이 한 달 내 같은 범죄를 재차 저질렀기 때문이다. 실효성이 적은 처벌임이 증명되었음에도 교회재판소는 같은 보속 처벌을 계속 해나갔고 덩달아 교구 주민들의 불만도 커졌다.
제임스 1세의 스포츠 선언이 유효하던 시기에도 안식일에 크리켓을 즐겨 처벌 받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는 스포츠 선언에 크리켓을 포함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제임스 1세가 스포츠 선언에서 안식일에 허용하는 스포츠에 크리켓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확인되지 않는다.
3. 크리켓은 위험한 운동인가?
필자는 본 리포트를 통해 1712년 한 신문의 논평에 실렸던 말버러 공작과 타운센드 공작의 사례를 소개하였다. 이는 무려 안식일에 도박을 한 행위에 대한 비판을 담은, 좀처럼 의문점이 들기 힘든 짤막한 글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본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안식일에 대한 궁금증을 넓혀나갔고, 안식일에 스포츠를 즐기는 것, 심지어 도박을 하는 행위까지도 허용되었던 시기가 존재했다는 뜻밖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안식일엄수주의를 고수해왔던 청교도와 이들을 경계했던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간의 일종의 줄다리기와 같은 것이었다. 필자에게 남은 한 가지 의문점은 제임스 1세의 스포츠 선언이다. 제임스 1세가 스포츠 선언에 포함하지 않은 활동은 곰 사냥과 같이 위험하고 안식일 제도에 반하는 정도가 매우 심각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크리켓이 이러한 활동들과 비견될 만큼 위험한 스포츠였다는 걸까. 언젠가 이 의문을 해소할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광채. 근대 현대교회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Altham, Harry. A History Of Cricket Vol 1. London: Allen & Unwin, 1962.
Bratt, John. The heritage of John Calvin: Heritage Hall lectures. Grand Rapids: Eerdmans, 1973.
Holmes, Richard. Marlborough: England’s Fragile Genius. London: HarperPress, 2008.
Major, John. More Than a Game. London: HarperCollins, 2007.
McCann, Tim. Sussex Cricket in the Eighteenth Century. Lewes: Sussex Record Society, 2004.
Packer, James. Among God’s giants: aspects of puritan Christianity. Brighton: Kingsway Communications, 1991.
Underdown, David. Start of Play. Westminster: Allen Lane, 2000.
[학위 논문]
윤상원. 안식일 교리의 역사: 초대교회부터 청교도까지. 석사, 총신대학교, 2006.
[원사료]
Barker, John. The Devil and The Peers: or The Princely Way of Sabbath-breaking. London: 1712.
Cotgrave, Randle. A Dictionarie of the French and English Tongues. London: 1611.
Westminster Assembly. Westminster Standards: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Westminster: 1647.
[기타]
Encyclopaedia Britannica. “Book of Sports.” Accessed November 23, 2022. (http://www.britannica.com/topic/Book-of-Spo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