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은 로마로 이주했던, 게르만족 중 비교적 로마화된 집단이었다.
이들은 라인강 동쪽의 원주지를 버리지 않고 세력 팽창의 본거지로 삼았다.
이후 이들이 세운 왕국은 현재까지도 “프랑스”라는 국가로 이어져 오고 있는데, 프랑크 왕국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서양 봉건사 시리즈의 두 번째 포스트에서는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프랑스 왕국이 등장하고 분열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1. 프랑크족의 통일
서론에서 이야기했듯이 프랑크족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라인강 동쪽의 원주지를 버리지 않고 본거지로 삼았다. 프랑크 왕국의 창시자는 메로베우스(Meroverus)로 알려져 있는데, 따라서 프랑크 왕국의 첫 왕조가 메로메우스 왕조이다. 다만 그의 아들 킬데리크 1세(Childeric I)와 달리 메로베우스의 실존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프랑크족은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살리카법(Lex Salica)으로 유명한 살리족(Salian Franks)이 있는데, 살리족과 살리카법의 이모저모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5세기 말, 여러 부족으로 나뉘었던 프랑크을 통일한 것은 킬데리크의 아들 클로비스 1세(Clovis I)였다. 클로비스가 프랑크족을 통합한 때를 프랑크 왕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으로 본다.
클로비스는 아리우스파에 속한 인물이었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아내이자 부르군트의 공주였던 클로틸드(Clotilde)의 설득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이후 정복운동을 전개하면서 프랑크족의 다른 분파를 계속하여 통합해나가 통일을 이뤘던 것이다.
2. 카롤루스 마르텔
8세기 프랑크 왕국의 왕들은 매우 무능했다. 그리고 이를 견디지 못했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카롤루스 마르텔(Charles Martel)’이다.
마롤루스 마르텔은 궁재로서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피핀 2세(Pepin II)의 아들이다. 피핀 2세의 적자들이 이미 죽었던지라, 그는 손자들에게 실권을 물려주었고, 무능력한 조카들이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는 것에 불만을 품었던 마르텔이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정국을 장악하였다. 그렇게 719년, 카롤루스 마르텔은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궁재로서 실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마르텔 치하의 프랑크 왕국은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이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가 프랑크 왕국을 침공하였다. 이들은 프랑크 남부로 지속하여 프랑크 왕국을 압박하였는데, 마르텔이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군을 완전히 격파하면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서유럽 지역을 지켜내었고, 군사 영웅으로서 그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3. 교황과의 섭정, 카롤링거 왕조의 등장
카롤루스 마르텔이 죽고 그의 뒤를 이은 피핀 3세(Pepin III)는 아버지의 궁재직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들을 모두 쫓아낸 이후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는데, 이에 카롤링거 왕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피핀 3세는 무능한 왕들을 쫓아내기 위해 정당성을 얻어야 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서로마의 교황 자카리아(Zacharias)였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왕좌를 차지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얻고자 했다.
카롤루스 마르텔 시절 교황은 북부 이탈리아에 거점을 잡은 랑고바르디족(Langobardi)에게 지속해서 괴롭힘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교황은 그에게 랑고바르디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마르텔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가 이슬람족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랑고바르디족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서사를 알고 있던 피핀은 교황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서신을 보낸다.
” 국왕의 칭호를 가진 자와 현실에서 국왕의 모든 권리를 행사하는 자, 어느 쪽이 왕관을 써야 마땅합니까?”
서신은 실권을 쥐고 있던 피핀이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었고 마침 괴롭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교황은 기꺼이 회신을 보낸다.
” 실력이 없는 자가 국왕으로 있기보다, 진정으로 국왕이 되기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자가 국왕이 되어야 합니다.”
중세판 러브레터(?)인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이후 유럽 사회의 거대한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프랑크 왕과 교황의 관계는 앞으로 시리즈에서 중요하게 다룰 예정이다.
교황이 피핀의 서신을 반가워한 것이 랑고바르디족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게르만족이 많았던 서로마 지역의 교회에선 포교를 위해 마리아 동상 등을 적극 활용했다. 그런데 동로마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을 금지하면서 서로마 교황이 크게 반발하였고 동서 교회의 갈등은 매번 깊어져 갔다. 이런 동서 교회의 관계도 지지 세력을 얻고자 했던 서로마 교황이 서신을 반가워했던 이유 중 하나이다.
그렇게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은 피핀이 프랑크 왕들을 몰아내고 직접 왕좌에 앉게 되면서 카롤링거 왕조가 개창되었다. 피핀은 교황에게 보답하고자 랑고바르디족으로부터 빼앗은 정복 영토 일부를 교황에게 기증하는데, 오늘날의 교황령이 바로 이 영토이다.
교황령이 생기면서 교황 국가가 수립되었고, 이에 교황이 세속적 권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교황의 모습은 이때부터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4. 정복군주 카롤루스 대제
피핀 3세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Charlemagne)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중유럽, 이베리아 등으로 지속적인 외정을 펼쳤고, 프랑크 왕국의 판도를 크게 확장시키며 서로마 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다른 군주들과는 남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는 독일과 프랑스의 공통의 뿌리로서, 2000년대 전후로 유럽 통합이라는 화두가 대두되면서 유럽 전체 커뮤니티의 조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카롤루스 대제는 774년 서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여러 개로 분열된 게르만 왕국을 전부 통일시켰고 라인강 동쪽의 작센 지역까지 정복하면서 기독교화시켰다. 남쪽으로는 랑고바르디족을 멸망시키면서 이탈리아 중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이에 정복 군주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3세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쳐해 있었다. 그는 롱고바르디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도 껄끄러웠기에 신변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교황은 외부 세력, 특히 프랑크 왕국의 도움이 절실했고, 카롤루스 대제에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교황에 대한 적대 세력의 행동은 생각보다 거셌다. 799년 4월 25일, 교황에 대한 로마 귀족들의 테러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말을 타고 이동하는 교황을 끌어냈던 것이다. 카롤루스는 교황을 프랑크 왕국으로 피신시켰고 레오 3세는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로마로 들어온 레오 3세는 급작스럽게 카롤루스 대제의 황제 대관식을 거행한다. 상당히 뜬금없게 느껴지지만, 사실 이는 교황이 카롤루스 대제라는 확실한 지지세력을 얻고자 진행한 것이었다. 어찌됐든 레오는 강력한 후견자를 확보하였고, 카롤루스 대제는 서로마 황제이자 서유럽의 패권자로 자리매김 하였다.
당시 프랑크 왕국의 사회 계급은 자유민과 자유민이 아닌 사람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중에서 고대 로마 귀족의 후손과 게르만족의 상층이 중세 장원의 원형이 되는 토지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9세기에 장원이 등장하기 전 바로 봉건제도의 원형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그렇게 교황과 카롤루스 대제는 각각 종교와 정치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러한 경위로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밀월관계가 시작되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교회를 보호하는 동시에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이에 주교가 세속화되고 제후화되는 현상이 생겨나게 된다.
5. 교회의 세속화
앞선 과정을 통해 교회는 이전보다 세속화되었다. 군주가 자기 제국 안에 있는 교회를 장악하고 교회 내의 여러 직책들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 사회 각 도시에는 주교가 있었는데, 본래 이들은 교황 밑에 있던 선출직이었다. 하지만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종교적 성격이 퇴색된 것이다.
황제 권력이 교회 관직에 관여했던 일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고대 로마 말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I)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같은 현상이 존재했다. 당시 교황은 로마에서 선출된 이후 황제에게 선출에 대한 승인을 받아야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교황의 선출일과 직무 수행 기간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카롤루스 제국 시대에는 황제가 교황을 임명하지는 않았다. 황제 권력은 제국 내의 교회를 장악하고 있었을 뿐이다. 당시 주교는 곧 제후였으며, 이들에게서 성직자다운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6. 카롤링거 르네상스
카롤루스 대제는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으나, 문화적 부흥에 대한 의지는 확고한 인물이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문화 부흥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을 동시에 전개하였다. 이는 오늘날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불리며, 현대 유럽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카롤루스 대제는 우선 성직자에 대한 교육 정책을 펼쳤다. 또한 수도원에 귀족들의 자제를 보내 교육을 받도록 하였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수도원이 교육을 전담하는 기관이 되었다. 이 시점에 ‘3학 4과’로 불리는 교양교육 채계가 부활한다. 3학 4과는 ‘자유학예’로도 불리는데, 고대 그리스 시대 자유인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함양해야 할 교양들이었다. 3학(Trivium)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으로, 4과(Quadrivium)는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으로 구성된다.
카롤루스 대제의 문화부흥 의지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유럽 각지에서 학자들을 초빙하여 수도원에서의 고전 연구와 필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이들은 라틴어 문헌을 수집하여 필사하여 옮겨 적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당시 고대 로마 문헌은 대부분 파피루스에 쓰여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고대 로마의 문헌 중 파피루스로 쓰인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 바로 카롤링거 르네상스 당시 필사된 문헌들이 지금까지 내려져 온 것이다.
다만 이런 문화 부흥 정책도 나름의 한계가 존재하는데, 기독교의 진흥에 도움이 되는 문헌만을 선별적으로 필사하였다 보니 그 다양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했다는 점이 있다.
당시 법률 편찬과 정비도 이루어졌는데, 특히 다음 포스팅에서 다룰,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프랑크족의 관습법인 살리카법(Lex Salica)를 성문법으로 정리하였다.
7. 카롤링거 시대 교회와 국가
당시 성직자는 신과 국왕을 동시에 섬기고 있었다. 다시 말해 교회와 황제에게 동시에 봉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양쪽에 동등하게 충성한 것은 아니고, 시대에 따라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쪽에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타락한 주교들의 악습과 권력 남용, 성직 매매 등이 사회적으로 규탄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샬롱 공의회(813년)와 투르-파리 공의회(829년)이 열리면서 이들의 행태를 규탄하였다. 하지만 군주가 주교를 임명하는 관행에는 문제를 삼지 못하는데, 여기에 교황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벌어진 일이 바로 그 서임권 투쟁이다.
8. 프랑크 왕국의 분열
루도비쿠스 1세(Louis the Pious)가 사망한 후 상속자들간의 분쟁이 불거졌고 제국의 분할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에겐 세 아들 루트비히 2세(Ludwig II), 샤를 대머리왕(Charles le Chauve), 로타르 1세(Lothair I)가 있었다. 이들은 프랑크 제국을 동프랑크(오늘날의 독일), 서프랑크(오늘날의 프랑스), 로타링기아(오늘날의 이탈리아)로 삼등분하여 각각 소유하게 되었다. 이 내용을 담은 조약이 바로 843년 체결된 베르됭 조약이다.
27년 후 메르센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크 제국의 분할이 확정되었다. 이후 로타링기아의 북부 지역은 루트비히와 샤를 대머리왕이 분할 소유하게 되었다.
9. 결론
프랑크족의 통일과 프랑크 왕국의 형성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프랑크 왕국의 분열로 마무리된다.
클로비스 1세가 프랑크족을 통일하며 시작된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마르텔과 피핀 3세, 카롤루스 대제를 거치며 확장을 지속했다. 교황과의 밀월 관계 속에서 카롤링거 왕조는 강력한 세속적 권력을 쥐었고,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 활동과 문화 부흥을 통해 유럽의 중요한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루도비쿠스 1세 사후, 그의 아들들 간의 분쟁으로 인해 프랑크 제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로타링기아로 분할되며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는 843년 베르됭 조약과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확정되었으며, 이후 오늘날의 독일과 프랑스 등 여러 유럽 국가의 형성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프랑크족의 관습법이었던 살리카법(Lex Salica)에 관해 다뤄도보록 하겠다.
참고문헌
볼프강 베링어, 『기후의 문화사』 (공감in, 2010).
Matthew Innes, Introduction to Early Medieval Western Europe, 300-900. The Sword, the Plough and the Book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7).